지난 29일 일본 가나가와(神奈川)현 요코하마(横浜)시의 조용한 주택가에서 '오카와(大川)'라고 적힌 문패를 찾아 벨을 눌렀다. 기자를 만난 오카와 유타카(大川 豊·71)는 인터뷰 내내 쑥쓰러워했다. 그는 간토(關東)대지진 당시 조선인 300여명을 보호했던 쓰루미(鶴見) 경찰서장 오카와 쓰네키치(大川常吉·1877~1940)의 손자다.
그는 1일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도쿄지방본부 주최로 도쿄국제포럼에서 열리는 ‘제100주년 한국인 수난자 추념식’에 오카와 서장의 유족 자격으로 초대됐다.
“당시 일에 대해선 아는 것이 없다”고 손사래 치던 그가 건넌방에서 1200쪽이 넘는 책 한 권을 들고왔다. 가나가와현 경찰이 대지진 3년 뒤 발간한 책엔 당시 상황을 경찰이 수집해 정리한 기록이 담겨있는데, 조부가 등장한 대목마다 표시돼 있었다.
가나가와 경찰 기록으로 본 그날
당시 46세이던 오카와 서장은 쓰루미 경찰서에 조선인을 하나둘 보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부하 경찰관들조차 동요했다. 오카와 서장은 “조선인들은 모두 선량한 사람(良民)”이라며 설득했지만 쉽지 않았다. 동요가 이어지자 오카와 서장은 조선인들을 근처에 있던 절 본당으로 이동시켰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관 30여명을 배치했다. 조선인의 수가 계속 늘자 그는 다시 경찰서로 이들을 옮겼다.
대지진 사흘째인 9월 3일, 1000명이 넘는 무리가 쓰루미 경찰서를 에워쌌다. “경찰서가 조선인 보호소냐, 조선인을 내놓으라”는 위협이 이어졌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오카와 서장은 “조선인에게 손을 대볼테면 대보라. 한 명이라도 넘겨줄 수 없다”고 맞섰다. “한 명이라도 탈출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자경단의 항의에 그는 “만약 한 명이라도 도망치는 사람이 있다면 할복하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자경단은 돌아갔고, 그가 이렇게 구한 조선인은 약 300명에 이르렀다.
경찰 기록 외에도 당시 그의 행적을 좇은 기록이 있다. 재일동포 작가 박경남 씨가 오카와 서장의 아들과 목격자들을 취재해 1992년 출간한 책『두둥실 달이 떠오르면』이다. ‘불량한 조선인’을 내놓으라는 자경단의 겁박이 있던 9월3일, 오카와 서장은 “조선인들이 독을 투입한 우물물을 가져와라. 내가 먼저 마시겠다. 이상이 있으면 조선인들을 넘기겠다. 이상이 없다면 이들을 나에게 맡기라”고 일갈했다. 오카와 서장은 왜 조선인을 감싸느냐는 자경단의 힐책에 “어느 나라 사람이든 사람의 생명은 변함이 없다. 인간의 목숨을 지키는 것이 나의 일이다”라고 답했다.
그는 “조부는 가나가와현에서 경찰서 4곳을 돌며 근무했다”고 밝혔다. “경찰이니까 동네에 서로 얼굴을 익히고 알고 지내던 조선인들이 많았을 테고,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 경찰의 일이라고 생각해서 보호했을 뿐이었을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오카와 가문의 보물, 사진으로 남은 그날
편지는 오카와 서장의 보호로 목숨을 구했던 조선인들이 대지진 5개월 뒤 보낸 감사장이다. 일본어가 아닌 한자와 한글을 섞어 써내려간 편지 말미엔 8명의 조선인 이름이 적혀있었다. 오카와 유타카는 “한글은 잘 모르지만 한자만 봐도 당시 어떤 마음으로 썼을지 느껴진다”면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지를 보여주는 사진을 오카와 가문은 왜 지금껏 보관하고 있었을까. 그는 “전쟁으로 당시 기록이 많이 유실됐는데, 조부는 이 사진들을 남겨서 상황이 이랬다는 것을 증거로, 기록으로 남겨두려 했던 것 같다”고 전했다.
"조부, 당연한 ‘인간의 도리’ 했을 뿐"
간토대지진으로 6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목숨을 잃었다. 오카와 유타카는 기자에게 “국적이 무엇이든 간에 사람의 목숨은 소중하다”며 “조부가 특별히 무언가를 한 것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인간의 도리’를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