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 영화' 개봉의 정치학
‘세계 첫 원폭 실험 기념일’ 직후 개봉한 미국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뉴멕시코주 알라모고도(Alamogordo)에서 1945년 7월 16일 있었던 세계 최초의 원폭실험 ‘트리니티 테스트’. 영화에서는 CG를 사용하지 않은 폭발 장면이 화제였다. 미국 개봉은 이 시기와 맞물렸다. 영화 제작ㆍ배급사는 개봉 직전 ‘트리니티 기념일 상영 행사’도 열었다. 놀런 감독, 노벨 물리학상의 킵 손 박사, 원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로 퓰리처상을 받은 카이 버드 등이 참석했다.
‘오펜하이머’는 이미 49개국에서 개봉, 글로벌 흥행 수익 6억5000만 달러(약 8703억원)를 넘겼다. 3시간이라는 긴 분량에 R등급(청소년 관람 불가), 어려운 물리학의 주요 인물들이 등장하는 묵직한 전기 영화라는 진입 장벽에도 불구하고 놀런 감독의 역대 최고 흥행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개봉 일정도 못 잡은 일본
그러나 원폭 투하 78년을 맞은 일본에서는 아직 개봉 일정도 잡지 못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 공개된 ‘바비’‘미션 임파서블:7’이 이미 일본 극장에 걸린 것과도 대비된다. ‘오펜하이머’의 미국 시사회 때 일본 교도통신은 “‘원폭의 아버지’ 전기 공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황폐화 묘사하지 않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영화가 R등급을 받은 것이 피폭 묘사가 끔찍해서일 줄 알았는데, 정사 장면 때문이었다”(도요케이자이)며 실망을 표하거나, “과학자의 고뇌를 그리는 데 역점을 둔 나머지 원폭의 위험을 환기하는 것을 간과했다”(아사히신문)는 지적도 나왔다.
영화는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는 장면이나 피폭자들의 모습은 다루지 않는다. 놀런 감독은 이에 대해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영화는 오펜하이머의 삶에 대한 나의 해석”이라며 “원폭이 자칫하면 세상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도 (트리니티) 실험 버튼을 누른 바로 그 방으로 관객들을 데려가고 싶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일본 관객들이 불편할 만한 장면들도 있다. 첫 원폭 실험이 성공한 뒤, 또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뒤 연구원들이 환호하는 모습이나, 폭탄 투하 도시를 결정하는 장면이 그렇다. 트루먼의 전쟁 장관 스팀슨이 “일본 내 12개 도시를 꼽았어요. 아니, 일본인들에게 문화적 의미가 큰 교토를 제외한 11곳이요. 교토는 아내와 신혼여행을 갔던 곳이기도 하죠”라고 무심하게 말하는 대목이다. 감독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 장면을 연기할 때 회의실의 다른 배우들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배우들의 호연이 빛난 순간이 마음에 들어 이 장면을 꼭 영화에 넣겠다 마음먹었다”라고도 했다.
일본에서는 놀런 감독의 인기가 한국만큼 높지 않다. 국내에서는 역대 박스오피스 100위권에 ‘인터스텔라’(29위), ‘다크 나이트 라이즈’(78위), ‘인셉션’(87위) 등 그의 작품이 세 편이나 있지만 일본에서는 역대 외화 흥행 수익 100위권에 들지 못했다. 근작 ‘테넷’이 2500만 달러, ‘덩케르크’가 1480만 달러 수익을 내는 데 그쳤다. 일본에서 외화 수익 100위를 기록한 ‘다이하드3’의 경우 4954만 달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