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같은 더위는 처음 겪는 듯
자연이 힘들면 마음도 무거워
반딧불이 빛이 주는 작은 위안
자연이 힘들면 마음도 무거워
반딧불이 빛이 주는 작은 위안
내가 쓴 졸시 ‘동근(同根)’이라는 시가 있다. ‘대지가 가물어 사람도 가물어요/ 나는 대지의 작은 풀꽃/ 흥얼거리는 실개천/ 대지에 먹을 물이 모자라니/ 나는 암석 같아요.’
자연이 가뭄에 시달리면 사람도 가뭄을 겪는다. 생활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가뭄이 든다. 가뭄이 들면 자애(慈愛)가 사라지기 쉽다. 장마와 태풍을 겪을 때도 마찬가지다. 자연이 겪는 일을 사람도 생활에서, 또 마음에서 그대로 겪는다. 자연과 사람이 하나의 뿌리에 의지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작은 풀꽃과 다를 바 없고, 실개천과 다를 바 없어서 자연이 가물면 사람의 생활과 마음도 돌멩이처럼 바위처럼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큰 더위에는 더위를 피해 손을 놓고 좀 쉬기도 해야 할 테다. 내 사는 시골 동네에 어르신 두 분이 사시는 집이 있다. 어느 날 낮에 그 집 앞을 지나가는데 대를 엮어 늘어뜨린 발이 보였고, 그 발을 넘어 유행가 소리가 골목까지 흘러나왔다. 그 풍경은 이 무더위를 잘 넘기는 어떤 좋은 수가 아닐까 싶었고, 또 삶의 여유가 느껴졌다. 그 집은 여름밤이면 동네에서 가장 먼저 불을 끄는 집이기도 했다. 창문은 모두 활짝 열려 있었고, 캄캄한 집 안쪽으로부터 텔레비전 소리가 들려왔다. 가끔 말을 나누는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지나가다 우연히 만난 그 집의 밤 풍경도 어떤 안식을 안겨주었다. 낮에도 밤에도 그 집은 내가 호되게 겪는 큰 더위를 모르고 사는 집처럼 여겨졌다. 아마도 그 어르신들은 지혜가 있으시고 또 마음을 느긋하게 쓰시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그 집이 시원한 그늘을 잘 키운 집처럼 느껴졌다.
나는 큰 더위의 시간을 살면서 두 가지를 문득 떠올렸는데, 그 하나는 돌로 만든 수곽이었다. 절에 가서 보게 되는 이 돌로 만든 수곽에는 깨끗한 물이 흘러내려 돌통을 채우고, 다 채운 후에는 넘쳐 흘러내려간다. 물소리가 끊이지 않을뿐더러 물소리는 격렬하지 않고 급하지 않다. 제 몸인 수곽에 더 많은 물을 가두려고 하지도 않는다. 받아들이되 가득 차면 내보낸다. 이 돌 수곽이 왜 갑자기 떠올랐는지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돌 수곽처럼 이즈음을 산다면 덜 지치게 되고 마음에서 자애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는 둥글게 모은 두 손바닥 안에 든 반딧불이의 빛이었다. 이것을 떠올린 것은 얼마 전 영화 ‘클래식’을 다시 보고나서의 일이었다. 영화에는 남녀 두 주인공이 여름방학을 맞아 시골에 갔다가 만나선 나무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그때 남자 주인공이 물가를 날고 있는 반딧불이를 잡아 여자 주인공에게 주는 장면이 나온다. 남자 주인공의 두 손안에서 빛을 내던 반딧불이는 이내 여자 주인공의 두 손안에서 빛을 냈다. 아름다운 여름밤의 풍경이었다.
청춘의 연인들 사이의 순수한 사랑은 이 영화에 인용된 괴테의 시를 통해서도 전달된다. 그 문장은 ‘태양이 바다에 미광을 비추면 나는 너를 생각한다. 희미한 달빛이 샘물 위에 떠 있으면 나는 너를 생각한다’였다. 괴테의 시 ‘연인 곁에서’의 일부였다. 두 주인공이 손으로 소중하게 감싼 반딧불이의 빛은 치장하지 않은, 화려하게 수식하지 않은, 수수한 사랑의 빛이 아닐까 싶었다. 동시에 이 반딧불이의 빛이 뜻하는 것 또한 수곽의 물이 뜻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큰 더위도, 큰바람도, 큰비도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들이 지나가는 동안 우리의 생활과 마음이 덜 다치기를, 자애의 빛이 사그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