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름은 나에게만 가혹했던 것이 아니라 식물들에 고통의 시간이었음이 틀림없다. 매년 힘들지 않았던 때가 없었지만 그래도 올해는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울 듯, 엊그제부터 속초엔 바람의 결이 사뭇 달랐다. 축축하지만 분명 찬 바람이 불었다. 북상 중인 태풍 탓이라는데, 무섭기로는 태풍이 더할지 몰라도 그 덕에 오븐 안처럼 나갈 구멍도 없이 뜨겁던 공기가 사라지니 잠시일지라도 한숨이 돌려진다.
사람 키를 넘기는 펜넬은 꽃 진 자리에 어느새 탐스러운 씨를 맺는 중이었고, 아치에 매달린 덩굴 포도의 열매가 초록색에서 어느덧 보랏빛으로 변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지금껏 한 번도 수확을 못 해본 노란 사과가 네 알이나 탐스럽게 매달려 있었다.
아, 세상일은 왜 이리 대가를 오롯이 치르게 하는지 몰라도, 아무리 덥고, 힘들어도 묵묵히 할 일을 한 식물들에만 허락된 결실의 가을이 오는 중이었다. “가을이 올까요?” 난 올여름 내내 이런 의심을 했던 모양이다. 명료해진 머리가 답을 준다. 영어의 가을 ‘오텀(autumn)’은 와인 수확을 관장하는 신, 오포라의 시간이란 의미다. 우리말 ‘가을’에도 ‘거두다’라는 뜻이 있다.
이제 절기상으로도 입추를 넘겼다. 아직 남은 여름의 가혹함이 발목을 잡더라도 기어이 가을을 볼 일이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