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44년이 흘러 이번엔 뉴욕입니다. 지난달 13일 페이스갤러리 본사 건물에 그가 있었습니다. 최근 이곳에서 마크 글림처 페이스갤러리 회장을 비롯해 관람객 120여 명이 모여 그의 ‘달팽이 걸음’을 지켜보았습니다. 이 화백이 ‘현대미술의 성지’ 뉴욕 한가운데서 자신의 이름을 또렷하게 알린 순간이었습니다.
홍익대를 졸업한 이 화백은 1970년대부터 한국 아방가르드 예술을 주도해왔습니다. 그에 따르면, ‘달팽이 걸음’은 “‘그리는’ 행위와 ‘지우는’ 행위가 하나 된 움직임으로 회화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일”입니다. 그의 작업에서 퍼포먼스는 핵심 그 자체입니다. 그는 캔버스를 마주 보지 않고 그림을 그립니다. 캔버스 뒤에서 혹은 옆에서 팔을 움직이는 것으로 작품을 완성합니다. 퍼포먼스는 그가 관객과 소통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알쏭달쏭한 움직임으로 그는 현장 관객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무엇이 예술이고, 예술이 아닌가’를 물어왔습니다.
이런 게 도대체 어떻게 작품이 되고 무슨 쓸모가 있느냐고요? 목사 아버지와 세브란스 병원 간호사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이 화백은 지난해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예술의 쓸모’가 내 평생의 화두였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예술은 사람들이 서로 교감을 할 수 있게 매개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는 그는 “예술은 쓸모없어 보이는 일을 극단까지 밀고 나가며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의사가 되지 않았지만 후회는 없다”고 했습니다.
오는 9월 1일부터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선 이 화백의 작업을 비롯해 김구림·성능경·이승택 등 한국 실험미술 운동을 소개하는 최초의 전시가 열립니다. 한국미술이 달팽이 걸음으로 지금 여기까지 왔습니다. “서두르지 마라. 기다림이 예술을 더 탄탄하게 만든다”는 그의 말이 경이로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