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전주에서 화원으로 활동하던 채용신이 왕의 부름을 받았다. 평생 화업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었을 테고, 그는 이 기억을 훗날 ‘평생도’라는 10폭 병풍으로 남겼다.
원래 18세기 말, 19세기 세도가들이 부와 영예가 자손 대대로 이어지길 바라면서 일생의 중요 순간들을 그리게 한 게 평생도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인증샷’을 남겼겠지만 그러지 못했으니 인생 늘그막에 회고하며 주문 제작했다. 채용신의 평생도가 특이한 것은 화가가 직접 자신의 일생을 남겼다는 점이다. 혼례, 초임지 부임 등 인생의 10장면을 담은 이 그림엔 뛰어난 초상화가답게 간략하게 특징을 잡은 그 자신의 얼굴이 뚜렷하다.
조선 후기 문인·화가들의 ‘결정적 장면’들을 기념한 회화 31건, 83점이 한자리에 모였다. 국립전주박물관에서 1일부터 열리는 ‘아주 특별한 순간-그림으로 남기다’ 특별전이다.
2부는 자연 속 특별한 순간들을, 3부는 특별한 행사들을 소개했는데 3부의 사실상 주인공은 채용신이다.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문화유산 중 ‘채용신 초상화’ 3점이 선보인다. 1920년대 그린 초상화에선 눈동자에 빛이 반사된 흰 점이 나타나는 등 서양화의 영향도 엿볼 수 있다.
전시회의 대미를 장식하는 평생도 역시 이건희 컬렉션에서 왔다. 화면 상단의 궁궐 담장 뒤쪽으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기가 휘날리고 있다. 하단엔 당시 경운궁을 지키던 일본군도 같이 그려졌다. 화가에겐 조선의 창업주 어진을 모사하는 감격스러운 날이지만, 열강에 휘둘리던 어수선한 시절을 환기하는 기록화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가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풍경 사진, ‘먹방’ 사진도 훗날 이 시대를 반추해줄 기록이 될지 모른다. 전시는 10월 2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