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의 ‘식탁’이 위협받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이상기후의 만연, 에너지 가격과 비료값 등 연일 치솟는 물가, 미·중 전략경쟁으로 인한 공급망 분절 등 중증 복합 위기에 빠졌다. 100%가 넘는 식량자급률을 자랑하던 유럽 주요국들조차 폭등하는 빵값에 살충제 사용을 줄이는 친환경 정책을 보류할 정도로 상황은 급박해졌다. 중국은 녹지를 경작지로 갈아엎기 시작했고, 일본은 주식 반열에 든 밀 생산을 서둘러 늘리겠다는 태세다. 한국인의 ‘밥상’에도 위기는 닥쳤다. 식량안보를 지키기 위한 지구촌의 총성 없는 식량 전쟁 현장을 들여다봤다.
중·일 양국 지도자들은 직접 나서 자국의 식량안보를 챙긴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3연임을 확정한 지난해 10월 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 당시 “중국인의 밥그릇은 우리 스스로의 손에 단단히 쥐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등 수시로 식량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 20일 열린 중앙재경위원회 회의에서도 “식량 안보는 국가의 대업이고, 경작지는 식량 생산의 생명”이라고 발언했다.
차이 주임은 당·정 업무를 총괄 조정하는 중앙 및 국가기관공작위원회 서기를 겸직하는 시 주석의 복심이다.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국가안전을 책임지는 차이 주임을 대동한 것은 국가안전과 관련이 깊은 식량 확보를 강조하기 위한 행보”(니혼게이자이신문)라는 해석이 나왔다.
시 주석의 지침에 따라 중국 각지에선 경작지 늘리기가 한창이다. 최근 중국 인터넷에선 “숲을 없애고 논밭을 일군다”는 뜻의 사자성어인 ‘퇴림환경(退林還耕)’이 뜨거운 이슈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 지난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리커창(李克强) 당시 총리는 “경작지를 확대해 식량 5000만t을 증산하겠다”(정부 활동 보고서)는 목표를 밝혔다.
곳곳에서 '경작지 늘리기' 운동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경제성장이 급물살을 타던 1990년대 후반부터 대대적인 녹화 사업을 벌였다. 황사 피해를 줄이고 농촌의 넘쳐나는 인구를 도시로 보내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녹화 중심에서 경작지 확보로 방향을 튼 건 그만큼 식량안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는 의미다.
중국은 지난해 옥수수 사룟값 폭등으로 중국인에겐 쌀과 함께 주식이나 다름없는돼지고깃값의 폭등을 경험했다. 이후 중국은 시 주석의 지시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던 미국산 옥수수 수입량을 줄이기 시작했다. 미국산 옥수수가 자칫하면 중국을 향한 ‘식량 무기’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에 따라 미국산이 차지하던 수입 물량 상당수를 중국과 가까워진 브라질산으로 대체 중이다.
중국이 걱정하는 건 식량 자급률의 하락이다. 지난해 1월 중국 국제경제교류센터의 발표에 따르면 중국의 식량자급률(칼로리 기준)은 지난 20년간 100%에서 76%까지 떨어졌다. 해마다 1%포인트씩 낮아진 결과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수입 곡물가는 급격히 올랐다. 특히 돼지 사료로 쓰이는 옥수수의 국제 시세가 2020년 초보다 두 배 이상 뛰면서 중국은 큰 타격을 입었다. 세계 최대 돼지고기 소비국인 중국의 밥상 물가를 폭등시키는 요인이 됐기 때문이다.
기후 변화도 중국의 우려를 가중시켰다. 지난해 최대 곡창지대인 창장(長江·양쯔강) 유역에 기록적인 가뭄과 폭염이 계속되면서 주식인 쌀 생산이 큰 타격을 입었다. 17개 성(省)에 걸친 농경지 220만ha가 가뭄 피해를 입어, 중국의 연간 쌀 생산량이 3~6% 줄었다는 평가(국제 신용평가사 피치)가 나왔을 정도다.
더 큰 문제는 패권 경쟁 중인 미국과 유럽 등 서방에 대한 의존도다. 주요 수입 곡물 중 옥수수의 경우 미국산 비중이 가장 높고, 밀은 호주·미국·캐나다산이 80%가 넘는다. 돼지고기 역시 유럽연합(EU)에서의 수입량이 절반 이상으로 가장 많다.
강준영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중국 지도부는 식량자급률이 계속 떨어지는 상황에서 농축산물의 상당량을 미국과 유럽 등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며 “현재 반도체 등을 중심으로 한 미국 주도의 공급망 재편이 언제든 식량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기시다, 식량안보 진두지휘
지난해 GFSI 평가에서 아시아 국가로는 유일하게 10위권 안에 든 일본이지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쌀을 제외하고는 자급률이 높은 편이 아니다. 실제로 일본의 식량자급률은 한국(32%, 2021년)보다 조금 높은 약 38%로 주요 7개국(G7) 중 가장 낮다.
일본의 자체 밀 수확량은 103만7000t(2019년), 국내 소비량의 16% 수준으로 한국(1%)보다는 나은 편이다. 현재 주로 홋카이도(北海道)에서 재배되고 있는 밀 생산량을 최대한 끌어올리겠다는 게 일본 정부의 복안이다.
작황 좌우하는 비료에도 신경
공급망 위기를 잇달아 겪은 탓도 크다. 2021년 말 중국이 석탄 가격 상승을 이유로 요소 수출을 중단하자 전 세계 요소 공급이 큰 차질을 빚었다. 석탄에서 추출한 암모니아로 제조하는 요소는 비료의 주요 원료이기도 하다. 요소의 공급 여부는 곡물 작황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와 러시아를 군사지원한 벨라루스가 서방의 제재로 비료 원료 수출이 제한되면서 또 한 번 비상이 걸렸다. 비료의 주원료인 염화칼륨의 경우 양국이 각각 세계 2, 3위 생산국인 상황에서 공급량이 급감하자 국제 비료 시세가 크게 뛰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식량자급 뿐 아니라 농산물 수출에도 노력한다. 이지평 한국외대 융합일본지역학부 특임교수는 “소득 수준이 높은 유럽 등지에서 일본산 고급 농산물에 대한 수요가 꽤 높아서 수출이 잘 되고 있다”며 “일본 정부가 식량안보를 강조하는 것은 식량자급률을 높이는 것뿐 아니라 농촌경제를 살려 지방소멸과 저출산에 대비하려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