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멋진 걸 엄마 아빠만 봤다니”
이 시대 젊은이들 탄성 쏟아져
세대통합 이끄는 ‘리듬 속 그 춤’
이 시대 젊은이들 탄성 쏟아져
세대통합 이끄는 ‘리듬 속 그 춤’
그러나 이런 찬사는 그의 춤이 재발견되면서 쌓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선구자들이 흔히 그렇듯 김완선은 처음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무려 38년차 가수 김완선의 1986년 데뷔 기사는 ‘기대되는 율동 가수’ 혹은 율동이 돋보이는 ‘비디오형 가수’라 쓰고 있다. ‘댄스 가수’ ‘댄스 음악’이란 말을 아직 안 쓰던 시절이었다. ‘비디오형’이라는 말에는 ‘오디오형 가수’보다 한끝 아래라는 폄하가 은근히 담겨있다. 춤곡이라면 여가수들이 간간이 발표하는 빠른 리듬에 약간의 율동을 곁들인 노래가 대부분이었다. 아이돌 댄스 가수의 원형이라 할 박남정이나 소방차보다 한두 해 앞선 데뷔였다.
온몸을 젖히는 웨이브와 목이 꺾일 듯한 헤드뱅잉, 앞발을 번쩍 치켜드는 동작 등 격렬한 춤을 추는 가수의 등장. 17세 소녀의 도발은 수십 년 군사독재 시대 대중문화에 어쩔 수 없이 깔려있던 근엄한 공기에 혁명적인 파열음을 냈다. 하지만 처음 보는 그 몸짓은 낯설었다. 대중은 ‘어떻게 저렇게 춤을 잘 출 수 있을까’ 넋을 잃고 빨려들면서도 ‘저렇게 춤을 춰도 되는 걸까’ 하는 걱정과 거리낌이 앞섰다. 지금 같으면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으로 칭송받을 그의 치켜뜬 눈은 늘 놀림거리였다. 1991년 ‘가요톱10’ 1위로 주류의 인정을 받기까지는 데뷔 후 5년이 걸렸다. 그것도 댄스곡이 아닌 발라드 ‘혼자만의 것’과 시티팝 ‘삐에로는 나를 보고 웃지’였다. 오늘날 명곡으로 꼽히는 ‘리듬 속에 그 춤을’은 물론 ‘오늘밤’ ‘나 홀로 뜰앞에서’는 하나도 1위를 못했다. 팬들이 “너무 빨리 태어났다”고 아쉬워하는 김완선은 이제야 시대와 제대로 된 접점을 찾은 듯하다.
반가운 건 그와 시대의 화해뿐만 아니다. 김완선은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 등에서 거듭되는 성공에도 “마치 남의 일 하듯 했고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시대를 앞서가는 기획력과 오늘날 아이돌 훈련 같은 방식으로 김완선을 스타로 만들어낸 매니저 이모였지만 그에게 잊지 못할 상처를 줬기 때문이다. 제대로 먹지도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고 칭찬 한 번 못 듣고 돈도 받지 못하며 하기 싫은 노래와 춤을 추다가 도망치듯 나왔다고 했다. 그는 오랫동안 주눅 든 채 자신과 불화하고 주변에 마음을 닫고 살아온 듯했다. 아직도 종종 이슈로 등장하는 연습생 인권이나 수익 정산 문제 같은 것을 훨씬 더 앞서 호되게 겪은 것이다. 오랜 시간 뒤 그가 직접 쓴 ‘Here I am’(2019)에서 ‘이젠 웃지 않아도 돼, 입술에 힘을 뺀 너의 모습 괜찮아’라고 하는 모습에 마음이 짠해지는 이유다. ‘댄스가수 유랑단’ 최근 방송에선 “아주 오랜만에 춤과 노래가 너무 하고 싶어 설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며 행복해했다.
열일곱 나이부터 ‘최초의 백댄서’ ‘최초의 본격 댄스가수’ ‘최초의 여성 밀리언셀러’ 같은 역사를 써온 김완선. 그는 이제 ‘가장 오랫동안 현역 댄스가수로 살아남은 유일한 존재’라는 새 역사를 쓸 일만 남았다. 자유롭고 행복해진 자신을 더 자랑스러워하는 개인의 역사도 함께 쓰면 좋겠다.
이윤정 문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