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도시인 피에트라산타는 세계적으로 ‘조각의 성지(聖地)’로 불린다. 미켈란젤로가 이곳에서 활약했고, 헨리 무어, 호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등 전설적인 거장들이 작업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1993년부터 그곳에서 거주해온 박씨는 현지에서 ‘마에스트로’로 불린다.
2018년 한국인 최초로 피에트라산타 시가 주는 최고 조각상을 받았다. 지난해 6월 새로 지은 고속도로 진출입 교차로에 그가 만든 높이 11m의 대리석 조각 ‘무한 기둥(Colonna Infinita)’이 세워졌다. 지난해 8월에는 세계적인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64)의 요청으로 보첼리의 고향 라이아티코에서 열린 콘서트 무대에서 ‘무한 기둥’을 선보였다.
최근 한국을 찾은 그는 ‘관객과의 대화’에서 “늘 낭떠러지 끝에 있다고 느끼며 일해왔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순간에 꼭 계단이 하나둘 나타나 나를 버티게 했다”며 “지금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성공한 조각가’로 살아가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 스스로 ‘성공한 조각가’라고 했다.
- “피에트라산타는 세계적인 조각가가 몰려 있는 도시다. 거기서 30년간 조각가로 일하고 있으면 성공한 것 아닌가. (웃음). 제가 그 누구보다 유명하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도 그곳에서 행복하게 작업하고 있다는 의미다.”
- 자부심은 어디에서 오나.
- “성공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돈을 굉장히 많이 벌었을 거라 생각한다. (웃음) 그 정도는 아니다. 지난 20년간 이탈리아의 많은 멋진 장소에서 전시를 열 수 있었고, 유럽 곳곳에서 꾸준히 개인전을 해왔다. 아무 걱정 없이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하는 게 성공 아니겠나.”
박씨의 돌 조각은 두 가지 색이 교차하면서 금이 간 듯 표현한 균열이 특징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게 하늘로 솟아오르는 듯한 ‘무한 기둥’이다. 서울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 야외에 설치돼 있다.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연상케 하는 이 기둥은 창공을 향해 상승하는 이미지다. 그의 작품에는 일부러 깨뜨려 만든 돌의 거친 표면으로 바람길처럼 틈이 나 있다. “그 틈과 균열이 내겐 숨통”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 깨뜨린 돌을 쌓은 조각이라니.
- “예전엔 돌 조각이라고 하면 덩어리 안에서 형태를 찾아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내가 왜 교과서를 따라야 하지’라는 의문이 들더라. 그래서 돌을 앞에 놓고 모두 깬 뒤 깨진 조각을 가지고 조립했다. 그때부터 나만의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 같다.”
박씨는 스위스의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80)와 함께 전남 신안군 자은도에 들어설 조각미술관 ‘인피니또 뮤지엄’ 건립에 참여하고 있다. 보타가 설계를 맡았고, 박씨 작품 다수가 소장된다. 보타는 피에트라산타에 내년에 개관하는 ‘박은선 미술관’(가칭)도 설계했다.
- 보타와는 어떻게 협업하게 됐나.
- “2014년 로마 유적지에서 열린 내 전시에 그가 찾아왔다. 좋아하는 건축가와 기회가 되면 어떤 형태로든 협업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희망을 빨리 이루게 됐다.”
- 작업을 계속해온 비결은.
- “30년 동안 달리기를 해왔다. 최근 몇 달간 바빠서 쉬었지만, 그 전에는 거의 매일 뛰었다. 스트레스 푸는 데 달리기가 최고였다. 뛰면서 정말 많이 울었다. 그렇게 울면서 뛰고 나면 가족에게도 말 못할 스트레스가 씻겨 나갔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작업에만 몰두한 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