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노트북을 열며] “은행에선 뛰지 마세요”

중앙일보

입력 2023.06.22 00:40

수정 2023.06.22 09:53

SNS로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김경희 경제부 기자

“Don’t run.”
 
지난 3월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이후 미국의 한 은행에 이런 문구가 걸렸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다. 뱅크런(bankrun·대규모 예금인출사태)에 대한 공포가 그만큼 크다는 의미다. 소나기를 피하려던 사람들이 하필 은행이 있는 건물 처마 밑으로 피하면서 긴 줄이 생겼는데, 다음 날 뱅크런이 발생해 그 은행이 망했다는 괴담도 떠돈단다. 실제로 미국의 중소은행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올해 1분기 미국의 사무실 공실률은 19%로 1992년 이후 31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상업용 부동산이 ‘약한 고리’로 지목되면서 해당 대출 비중이 큰 중소은행 위기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3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은행 본점 앞에 고객들이 길게 줄 서 있다. [신화통신=연합뉴스]

미 연방준비제도(Fed)가 6월 기준금리를 동결했지만 연내 추가 인상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 것도 부담이다. 예금금리·채권금리가 높아지면 자금조달비용도 늘어나 중소은행의 ‘유동성 리스크’가 커질 수 있어서다.
 
문제는 일시적인 유동성 위기나 루머가 뱅크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공포다. 실리콘밸리은행의 그렉 베커 전 CEO는 지난달 미 상원은행위원회 청문회에서 “(가상자산 전문은행) 실버게이트 캐피탈의 파산을 실리콘밸리은행과 연결 짓는 각종 소문과 오해가 온라인상에 확산하면서 뱅크런이 시작된 것”이라고 항변했다.


지금 남 탓할 때냐는 비판도 나오지만 일리 있는 얘기다. 실리콘밸리은행은 스타트업에 자금줄을 대주는 특화은행이다 보니 예금주 중 벤처캐피탈의 비중이 높은데, 이들은 뱅크런에 대한 민감도가 남달랐을 거란 추측이 나온다. 가상자산 거래소인 FTX가 뱅크런으로 파산했을 때, 거액을 투자했다가 손실을 본 벤처캐피탈이 적잖았기 때문이다.
 
SVB사태를 계기로 국내에서도 미 중소은행과 규제 환경이 비슷한 저축은행·새마을금고 등 비은행의 유동성 리스크 우려가 제기돼왔다. 한국은행은 21일 금융안정보고서에서 “비대면 수신 규모 확대 등으로 부정적 정보 확산시 보다 빠르게 예금이 인출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면서도 비은행간 상호연계성이 낮고 각 중앙회의 유동성 지원 여력도 있어서 전체 금융위기로 확산할 가능성은 제한적이라고 평가했다.
 
비대면 거래가 늘면서 은행의 고객 예금 관리는 더 어려운 숙제가 됐다. 과거에는 결혼과 비슷했다면 이제는 언제든 헤어질 수 있는 동거 관계라는 해석도 나온다. 국내 은행에서 “뛰지 마세요”와 같은 경고 문구를 보게 되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