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시에 사는 직장인 한모(38)씨는 지난달 전셋집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일을 떠올리며 분통을 터뜨렸다. 지난달 중순 한씨는 2년여간 살던 84㎡(이하 전용면적) 아파트의 전세계약이 끝났지만, 집주인으로부터 6억3000만원의 보증금을 제때 받지 못했다. 집주인이 전셋값을 4억5000만원까지 낮춰 후속 세입자를 구했지만 1억8000만원 모자랐다. 한씨는 “돈을 받아야 이사 갈 집 잔금을 치른다”며 전세금 반환 내용증명을 보냈고,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집주인은 계약 만기가 한 달 가까이 지나서야 신용대출(2000만원)과 회사 대출(1억원), 친척 도움(6000만원)을 받아 원금을 돌려줬다.
20일 중앙일보가 전국 아파트의 2021년 하반기 전세 거래 34만352건 가운데 올 들어 지난 13일까지 동일단지·면적·층에서 거래가 발생한 13만1435건을 분석한 결과, 전체의 58.3%인 7만6666건의 보증금이 계약 당시보다 하락했다. 하반기 전셋값이 상반기와 같을 경우를 가정한 수치다. 이 기간 전셋값 하락분은 총 6조2928억원이고,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돌려줘야 할 금액은 평균 8208만원이다. 서울로 범위를 좁히면 역전세 비율은 58%, 집주인 한 명당 전국 최고인 1억3177만원을 세입자에게 내줘야 한다. 17개 시·도 중 역전세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대구(90.9%)였고 울산(78.4%), 인천(77.5%), 세종(74.3%)이 뒤를 이었다.
빌라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부동산R114 조사 결과, 하반기 전세 계약 만기인 서울 연립·다세대 주택의 62%가 역전세 위험에 노출됐다. 2021년 하반기에 전세 계약된 빌라 4만6045건 중 올 상반기에 같은 단지·면적·층에서 거래된 2908건을 분석한 결과다.
올해 상반기 아파트 역전세 비율을 계산해 보니 전국 53.7%, 서울 53.3%였다. 전세 종료 시 집주인이 반환한 평균 금액은 각각 6477만원, 1억152만원이었다. 강남권 등 일부에선 집주인이 수억원씩 토해낸 ‘감액 계약’이 쏟아졌다. 최근 서울 서초구 잠원동 ‘신반포자이’ 84㎡는 2년 전 보증금(20억원)보다 7억5000만원 낮은 12억5000만원에 계약을 갱신했다.
대구시 수성구 범어동 ‘범어역우방유쉘’ 120㎡ 전세도 2년 전 8억3000만원에서 최근 3억8000만원 낮춘 4억5000만원에 계약됐다.
대구 역전세 비율 91%…집주인 ‘전세금용 대출’ 상반기 4.6조
세입자는 보증금을 제때 돌려받지 못해 아우성이다. 지난 1~5월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집주인을 대신해 돌려준 보증금은 1조565억원, 떼인 보증금을 되찾기 위해 법원에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한 건수는 1만5009건에 달했다. 둘 다 역대 최대다. 집주인은 돌려줄 전세금을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이다. 개포동의 전영준 새방공인 대표는 “5억, 6억원씩 메우느라 집주인의 등골이 휜다”고 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은행 대출창구를 두드렸다. 지난 1~5월 4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과 주택금융공사에서 신규로 취급한 전세금 반환 대출은 4조6934억원으로 1년 전보다 34.2% 늘었다.
다만 역전세난이 막연한 공포라는 의견도 있다. 송인호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정보센터 소장은 “최근 기준금리 동결로 매매가격과 전셋값 하락세가 주춤해졌다”며 “연말로 갈수록 역전세난이 진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반기 전셋값이 지금보다 5% 오른다고 가정하면 전국 아파트 역전세 비중은 48.6%로 완화할 전망이다. 김규정 한국투자증권 자산승계연구소장은 “역전세에 처한 집이 늘겠지만, 보증금 미반환 사고나 시장 변동성 확대 같은 부작용이 얼마나 커질지는 예측할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