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나무는 가로수 나무로도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밤송이 탓에 도시에선 보기 힘든 나무가 됐다. 여러 가닥으로 내려온 줄기에 작은 밤꽃이 줄줄이 매달려 있는 모습은 얼핏 거미줄로 뒤덮인 듯 보이기도 한다. 밤꽃 향기는 호불호가 명확해 싫다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의외의 반전이 있다.
나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갑작스럽게 부모님을 잃은 탓인지 고질적으로 찾아오는 불안증이 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기지 않겠냐는 이 막연한 불안함은 매번 어지러운 꿈자리로도 이어진다. 이럴 때면 잠옷 차림으로라도 성큼 마당으로 나가 정원 일을 시작한다. 그렇게 한두 시간 몰두하다 보면 어느새 그 불안함이 사그라지는 걸 경험한다. 그게 베치 박사가 말하는 식물 치유 효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삶이 무겁게 나를 누를 때 식물에라도 기대보면 어떨까 싶다. 어쩌면 피어난 밤꽃이, 그 향기가 길고 어두운 터널 끝의 빛을 보여줄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 오가든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