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문을 일으킨 건 익명으로 전해진 대통령실 관계자들의 발언이었다. 다음달 퇴임하는 박정화·조재연 대법관 후임 후보로 지난달 30일 8명이 추려지자 일부 후보자가 제청될 경우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소식이었다. 헌법이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하는데, 대통령이 임명하지 않을 권한도 포함된다고 해석했다.
반면 이 조항은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대통령에게 형식적 임명 절차를 부여한 것일 뿐이라는 주장도 많았다. 제청 과정에서 절차적 하자나 후보자에게 결격 사유가 없는 한 대법관후보추천위, 그리고 대법원장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대법관 임명을 거부한 전례는 없다. 외부로 갈등이 표출되기 전에 대통령과 대법원장이 후보자 논의를 해 온 게 관례였다고 한다. 지난해 김재형 전 대법관 후임으로 오석준 대법관을 제청할 때도 괜찮았는데, 왜 하필 이번에만 파열음이 들린 것일까.
9월 퇴임하는 김명수 대법원장이 마지막으로 제청하는 대법관 명단에 자신의 코드에 맞는 인사를 올릴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퇴임 후에도 당분간 대법원 성향을 전 정부와 자신에게 우호적으로 지속시키겠다는 의도가 있다는 해석과 함께였다. 남녀 성비를 고려해야 한다는 여론까지 고려한 특정 후보자들의 이름이 거론됐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실은 물론 법원 내부에서조차 소통이 부족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법원 내부망에는 ‘후보추천위에서 의견을 나누거나 토론하는 과정은 없었고 찬반 표결을 통해 후보자들을 정했다’는 소문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글까지 올랐다. 대통령실이 불편해한다는 두 명 대신 권영준 서울대 로스쿨 교수와 서경환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제청되면서 임명권 갈등은 봉합된 모양새다. 하지만 헌법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헌법 조항을 앞세운 부담은 대통령실에 남아 있다.
대법관 임명 거부권 첫 제기돼
대법원의 정치 코드화가 문제
사법부 정체성 고민 계기 돼야
대법원의 정치 코드화가 문제
사법부 정체성 고민 계기 돼야
현재 대법원은 김 대법원장과 13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 오석준 대법관을 제외하고 모두 문재인 정부 때 임명됐다. 김 대법원장이 회장을 지낸 우리법연구회와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이 6명이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회장과 젠더법연구회 회장 출신이 있다. 다음달 퇴임하는 박정화 대법관도 우리법연구회 소속이었다. 박 대법관을 제외하고는 모두 김 대법원장이 제청했다. 임기 중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마지막 대법관 교체를 앞두고 ‘알 박기 제청’을 통해 대법원의 구성을 당분간 현 구도로 유지할 것이라는 예상이 확산했다. 대법원까지 가게 될 중요한 재판들이 줄줄이 진행되거나 대기 중인 점을 고려하면 현 정권으로선 더 민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법원의 판결은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그에 따른 판례 변경 등을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정권의 성향에 따라 구성원이 바뀌고, 그 변화에 따라 기존 기준과 다른 정치 성향적 판례가 자꾸 나온다면 누가 사법정의를 믿겠는가. 치킨게임 같았던 대통령실과 대법원의 대법관 제청 갈등은 지난 6년간 진행된 사법부의 정치코드화와 그 파급을 되돌아볼 계기를 준 긍정적 측면이 있다. 윤 대통령과 9월 퇴임하는 김 대법원장을 대체할 차기 대법원장에게도 큰 과제를 각인시켰다.
윤 대통령 임기 중 대다수의 대법관이 임기 만료로 교체된다. 2021년 9월 임명된 오경미 대법관과 지난해 임기를 시작한 오석준 대법관을 제외한 전부다. 정치 성향이 아닌 법과 사실에 근거하고 양심에 따라 재판할 수 있는지가 명확한 후보자 기준이 된다면 사법의 정치코드화 악순환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