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의 향기

[삶의 향기] 쉬어라! 아주 길게, 아주아주 세게

중앙일보

입력 2023.05.30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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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우물쭈물 살다가 이렇게 끝날 줄 알았지.’ 약간의 오역(誤譯) 논란이 있는 아일랜드 작가 버나드 쇼(1856~1950)의 묘비명(墓碑銘)이다. 그의 이름 ‘쇼(Shaw)’와 발음이 유사한 모 이동통신사의 티저 광고(2007)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 ‘삶에는 낭비할 시간이 없다’라는 뜻으로 널리 알려진 이 문구의 ‘우물쭈물’이 말썽이다. ‘우물쭈물’로 번역된 부분의 원문은 ‘충분히 오래(long enough)’. ‘충분히 오래 머무르면 이런 날이 올 줄 내 알았지’로 직역하건, ‘살 만큼 살면 죽는 날이 올 줄 내 알았지’쯤이나 거기에서 몇 걸음 더 나아가건 의역은 각자 몫이다.
 
여러 묘비명에 담긴 삶과 죽음
자연? 성취? 소명? 희생? 선물?
죽음 대하는 자세가 삶을 결정
 

러시아 작곡가 알프레드 슈니트케의 묘비. [사진 위키피디아]

물론 셰익스피어 이후 최고의 문학가라는 칭송을 받은 그가, 노벨문학상(1925)을 받은 그가, ‘가장 뛰어난 소설가 12명을 꼽아 달라’는 요청에 자기 이름만 쭉 적을 만큼 오만(?)했던 그가 우물쭈물하며 살았을 리 없으니 이는 내 보기에도 오역이다. 하지만, 원문보다 더 마음에 와 닿는 이 멋진 오역문을 가슴에 담아 두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다. 그것이 꼭 위대하거나 유명한 누군가의 것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충분히 오래’를 ‘어떤 일이 일어날 줄 알면서도’를 거쳐 ‘우물쭈물’로 비약한 문학적 상상력에 대한 감탄까지 덧붙여.
 
이런 묘비명도 있다. ‘3.14159265358979323846264338327950288….’ 두말할 것 없이 원주율 값을 아르키메데스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소수점 35자리까지 밝혀낸 수학자 루돌프 판 코일렌(1540~1610)의 것이다. ‘드디어 더 멍청해지는 것을 멈췄다’(수학자 에르되시, 1913~1996)라는 겸손한 명문(銘文)도 있고, ‘오늘 당신이 억압하는 목소리보다 우리의 침묵이 더 강력한 날이 올 것입니다’(노동운동가 어거스트 스피스, 1855~1887)라는 외침도 있다. ‘형사 콜롬보’로 친숙한 피터 포크(1927~2011)의 영화 ‘그리핀과 피닉스’(1976)에서 언젠가 자신의 무덤을 찾아올 연인을 위해 ‘안녕? 그리핀, 당신이 찾아올 줄 알았어요’라고 쓴 것처럼 한 사람만을 위한 것도 있다.
 
반면 마음에 새길 문구(銘)나 기억할 만한 업적이 아닌 추상적 기호를 새긴 이도 있다. 다듬지 않은 검은 돌에 흰색으로 음각한 오선보와 온쉼표, 그 쉼표 위에 얹힌 늘임표…. 이미 눈치챘으리라. 어느 음악가의 것이리라고. 현대음악에 관심이 있다면 알만한 독일-유대계 러시아 작곡가 알프레드 슈니트케(1934~1998)의 묘비이다. 쉼표는 그 지시된 길이만큼 아무 소리도 내지 말 것을 지시하지만, 그 ‘소리 없는 소리’는 다른 소리와 함께 음악의 흐름을 형성한다. 비록 죽음으로 인해 작곡을 멈추었지만, 그의 음악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뜻일까? 한마디를 온전히 비우는 온쉼표 위에 늘임표까지 놓여있어 꽤 긴 시간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자세히 보니 앞뒤에 마땅히 있어야 할 세로줄(마딧줄)마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그 쉼표는 시작도 끝도 없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되 음악(그의 삶)의 한 부분을 이루며 영원히 계속되는 안식의 시간이다. 유럽 지역 묘비에 흔히 보이는 ‘평화 속에 안식을’, 즉 R.I.P.(라틴어 requiescat in pace)의 안식(安息)과 음악의 쉼표는 같은 단어(rest)이다. 이를 죽음으로 인해 분리된 영혼과 육체가 잠들어 있다가 최후 심판 날에 그것이 재결합한다는 기독교 문화권 믿음에 비춰보면 ‘쉼’은 ‘잠’, 즉 오늘(삶)에 대한 보상이자 내일(부활)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그러니 그에게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다.
 
그런데 그 쉼표 아래에, 늘임표로 모자라 마딧줄을 없애 길이를 가늠할 수 없는 영겁의 시간 동안 소리 내지 말라는 그 쉼표 아래에 기호가 또 하나 놓여있다. ‘fff(포르티시시모)’. 침묵하되 아주아주 큰 소리로? 현실적으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인 이 기호를 보며 육신의 쉼(아주 긴 쉼표)과 영혼의 정화를 바라는 절절한(포르티시시모) 갈망을 읽는 것은 너무 자의적인가.
 
스스로 남겼건 남겨진 이들이 그를 추모하며 썼건, 묘비명은 거기에 묻힌 이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축약한다. 그가 바라본 죽음이 곧 그가 바라본 삶이다.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규정하는 지가 우리의 삶과 죽음을 규정한다. ‘드디어 자유를 얻었음에 감사드립니다’(마틴 루서 킹, 1929~1968)에서 삶은 소명이고 안식은 보상이다. ‘이것은 아버지가 내게 행한 일이고 나는 누구에게도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아랍의 반종교적 철학자 알 마리, 973~1057)라는 글에서 삶은 거북한 것이고,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라는 천상병의 시구(詩句)는 삶이 선물이라고 말한다. 내게 있어 삶은 무엇일까.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