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 골목으로 함께 들어가 볼까요. ‘홍은동’ ‘장충동 1가 뒷골목’ ‘약수동 골목’ ‘성북동 산동네’ 등의 제목을 달고 있는 그림은 고독한 도시를 그린 호퍼의 그림보다 더 적막합니다. 사람 그림자 하나 눈에 띄지 않고,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멈춘 것 같은 풍경입니다. 실제로 화가는 주로 인적 없는 새벽에 길을 나서 그림을 그렸다지요.
기하학적 구성이 돋보이는 화면에 다채롭게 펼쳐진 잿빛 색조. 군더더기를 최대한 제거하고 가장 단순화된 선과 면, 색으로 회화의 본질을 탐구한 화가의 순수한 열정이 캔버스에 그대로 배어 묵직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전시의 또 다른 감동은 원 화백의 이 귀한 작품을 우리가 다시 마주할 수 있게 한 김태섭·윤영주 두 소장가의 스토리에서 나옵니다. 두 사람은 작가 지명도를 따지지 않고, 오로지 ‘그림’ 하나 보고 반해 자칫하면 흩어져 버릴 뻔했던 작품을 수십 년간 소장·보존해 왔습니다.
이번주에 전시 하나를 봐야한다면 그것은 단연 원계홍이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 21일 막 내릴 예정이었으나 관람객들의 호응으로 연장돼 다음 달 4일까지 열립니다. 3월 개막 당시엔 엄두도 내지 못한 도록(圖錄)도 관람객들의 요청으로 제작 중이라고 합니다. 특정 사조나 평가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우직하게 자기 길을 걸은 화가, 그리고 사심(私心) 없이 오로지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품은 두 소장가의 운명 같은 만남이 지금 한국 미술사의 새 장을 써내려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