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내전 연전연패 장제스 “공비들보다 우리가 10배 앞서”

중앙일보

입력 2023.05.27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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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77〉

항일전쟁시절 중공근거지 옌안 가는 길은 험했다. 웨이리황의 옌안 방문은 마오에게 감동을 주기 충분했다. 임지로 돌아온 웨이리황은 마오를 아낌없이 지원했다. [사진 김명호]

1946년 중반부터 본격화된 국·공내전은 시간이 흐를수록 우세가 중공야전군 쪽으로 기울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화가 치밀었다. 당 고위간부들 모아놓고 질책했다. “세계 역사상 지금의 국민당처럼 노후하고 썩어빠진 혁명정당은 없었다. 얼 빠지고 기율이 엉망이고 옳고 그름의 기준을 상실한 정당으로 전락했다. 진작 쓸어버려야 했다.”
 
외신기자들의 질문엔 짜증을 냈다. 연전연패를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면에서 우리가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공산 비적들의 장비, 전투력, 경험은 우리에 비해 보잘것없다. 군사물자 공급과 보급도 우리가 10배는 앞선다.” 군 지휘관들에겐 욕설까지 퍼부으며 분함을 억눌렀다. “너희들은 명색만 군사령관과 군단장이다. 수준이 형편없다. 자신의 지식과 능력에 의존해 외국에서 군 생활 한다면 연대장도 버거울 놈들이다. 낙후되고 인재가 없다 보니 능력이 쥐꼬리만 한 것들에게 중책 맡길 수밖에 없는 내가 한심하다.”
 
중공(중국공산당)을 부러워하며 칭찬하는 일기도 남겼다. “공비(共匪)들은 내가 갖기를 바라는 것과 우리 당이 갖지 못한 조직과 기율, 도덕성을 완벽히 갖추었다. 무슨 일이건 철저히 연구하고 토론하고 실천에 옮긴다. 우리 기간요원 대부분은 머리 쓰는 것을 싫어하고, 연구할 생각을 안 한다.”
 
장제스 “미 원조 기대다 중국인 자립성 상실”


항일전쟁시절 중국을 방문한 헤밍웨이도 중공의 통전 대상이었다. [사진 김명호]

미국과의 동맹이 추종자와 군 지휘관들에게 끼친 영향도 아쉬운 점이 많았다. “군대는 미군과 접촉하면서 사치를 즐기고 퇴폐가 만연해졌다. 성병환자도 늘어났다.” 맞는 말이다. 당시 정부군(국민당 군) 장교 반 이상이 매독과 임질로 끙끙댔다. 군의관과 위생병은 돈벌이에 급급했다. 전투가 벌어지면 제일 먼저 도망갔다. 부상병은 제대로 된 응급치료를 받지 못했다. 웬만한 부상에도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전쟁을 오래 한 나라에 불구자가 드문 이유를 장제스가 모를 리 없었다. “미국 원조에 의지하다 보니 중국인들은 전통적인 자립성을 상실했다”며 가슴을 쳤다.
 
장제스는 거미줄 같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1947년 9월 이런 일기를 남겼다. “저들의 조직, 훈련, 선전술이 우리보다 우수해도 이념, 사상, 정치노선은 우리가 선진적이고 민족의 요구에 더 부응할 수 있다. 연구를 통해 저들의 본질만 터득하면, 소멸시키는 것은 시간문제다.” 1949년 8월, 미국이 원조중단을 발표하자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었다. “국민당의 승리는 물 건너갔다.”
 
중공은 통전(통일전선)과 무장투쟁으로 성공했다. 2번에 걸친 국·공합작도 통전의 일환이었다. 합작은 동업이나 마찬가지였다. 분열이 당연했다. 군을 장악한 장제스의 칼질에 지하로 들어갔다. 두 차례 무장폭동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패잔병 이끌고 산속에 들어가 근거지 구축하고 소비에트를 설립했다. 군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패잔병을 홍군으로 둔갑시켰다. 말이 좋아 홍군이지 비적이나 다름없었다. 장제스가 대군을 동원해 소비에트를 압박했다. 도망에 도망을 거듭한 홍군은 옌안(延安)에 도착해 겨우 다리를 폈다.
 

대륙으로 돌아온 웨이리 황과 마오쩌둥의 만찬. [사진 김명호]

일본이 중공을 살렸다. 일본관동군의 동북침략으로 입장이 난처해진 동북왕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은 궁지에 빠진 중공의 통전대상 1호였다. 통전을 지휘하던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리커농(李克農·이극농)을 통해 장에게 접근했다. 장은 시안(西安)에 온 장제스를 감금했다. 저우언라이와 함께 국·공합작을 촉구했다. 구국과 항일을 능가할 명분은 없었다.
 
국·공합작으로 중공은 기사회생했다. 홍군도 국민혁명군 8로군으로 정규군에 편입됐다. 통전도 극성을 떨었다. 국민당 좌파와 민주세력, 말 잘하고 아는 것 많고 불평은 더 많은 지식인과 문화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효과가 기대 이상이었다. 홍색 수도 옌안 방문이 줄을 이었다. 지하당원도 괄목할 정도로 늘어났다.
 
휘하에 115만 대군을 거느린 웨이리황(衛立煌·위립황)은 통전 대상이 아니었다. 제 발로 옌안을 방문했다. 마오쩌둥은 근거지 설립 후 최대규모의 환영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12㎞ 밖에 환영 현수막 내걸고 중앙위원들이 직접 나가서 맞이해라. 200m 간격으로 현수막 걸고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성(城)입구에서 기다리다 회의실로 안내해라. 나는 회의실 앞에 서 있겠다.”
 
중공은 국·공합작 등 통전으로 기사회생
 

철학자 펑유란(馮友蘭)도 통전 대상에서 빠지지 않았다. 학생들과 함께 중공야전군의 베이핑(北平) 입성식 구경 나온 펑. [사진 김명호]

당시 옌안은 무기, 약품. 식량 부족으로 애를 먹었다. 마오쩌둥에게 웨이리황은 굴러들어온 복덩어리였다. 마오의 지원 요청에 토를 달지 않았다. 홍군의 아버지 주더(朱德·주덕), 중공 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남방국 서기 저우언라이와 항일군정대학 교장 린뱌오(林彪·임표), 훗날 신중국 개국원수 허룽(賀龍·하룡)과 감동을 주고받았다.
 
임지로 돌아온 웨이리황은 마오쩌둥과의 약속을 지켰다. 장총, 실탄, 수류탄, 박격포, 의약품, 식량, 애들 과자까지 아낌없이 지원했다. 일본 패망 후 내전이 시작되자 장제스는 웨이와 중공의 관계를 의심했다. 해외시찰 명목으로 외유를 권했다. 동북에서 연전연패하자 귀국시켰다. 보직은 주지 않았다. 마오는 의심 많은 장제스가 웨이를 해치지 않을까 우려했다. 장을 안심시키기 위해 신화사(新華社)가 발표할 전범자 명단에 웨이리황을 넣으라고 지시했다.
 
마오의 예상은 적중했다. 동북지구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한 웨이리황은 린뱌오의 동북야전군과 충돌을 피했다. 예하 지휘관들의 지원 요청도 거부했다. 동북야전군이 동북을 장악하자 장제스는 웨이를 난징으로 소환해 연금시켰다. 죽음을 기다리던 웨이는 중공지하당원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대륙도 싫고 대만도 싫다며 상하이를 거쳐 홍콩에 정착했다.
 
1949년 2월, 제2야전군이 웨이리황의 고향 허페이(合肥)를 점령했다. 웨이는 부모의 안위를 걱정했다. 주더에게 편지를 보냈다. “부모의 안전이 나의 유일한 소원이다.” 마오쩌둥과 주더가 제2야전군 정치위원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에게 긴급 전문을 보냈다. “웨이리황의 부모와 가족들을 극진히 보호해라.”
 
웨이리황의 홍콩생활은 국민당 특무의 감시로 순탄치 못했다. 저우언라이에게 귀국의사를 밝혔다.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은 감회에 젖었다. “웨이 장군은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집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도착하는 날 원수들이 나가서 영접해라.”
 
1955년 6월 대륙으로 돌아온 웨이리황은 신중국 개국원수 6명의 영접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