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비 고개숙인 尹·기시다…뒤에서 원폭 피해자가 지켜봤다

중앙일보

입력 2023.05.21 12:43

수정 2023.05.21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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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히로시마에는 약 10만명의 한국인이 군인·군속·징용공·동원 학도·일반 시민으로 살고 있었다. 1945년 8월 6일의 원폭 투하로 인해 2만여명의 한국인이 순식간에 소중한 목숨을 빼앗겼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문)  
 
21일 오전 7시 35분. 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앞에 윤석열 대통령 부부와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 부부가 일렬로 섰다. 이어 각자 백합 꽃다발을 헌화하고 허리를 숙여 약 10초간 묵념하고 추도했다.  
 
한·일 양국 정상이 처음으로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공동 참배하는 순간이었다. 한국 정상으로서도 첫 참배다. 일본 총리 중에는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가 1999년에 참배했다. 
 
윤 대통령과 김 여사는 검은색 넥타이와 같은 색 정장을 각각 맞춰 입었고, 기시다 총리 역시 검은색 정장 차림이었다. 유코 여사는 검정 치마에 흰색 재킷을 입었다.  


G7 정상회의 참관국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부인 기시다 유코 여사가 21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공동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양 정상 앞의 5m 높이 위령비에는 “거대한 파괴마(破壞魔)는 한국인이라고 해서 조금도 관대하지 않았다”고 쓰여 있었다.  
 
양 정상 부부가 참배하는 내내 박남주 전 한국원폭피해자 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 권준오 현 위원장 등 10여명의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이 뒤에서 지켜봤다. 박 전 위원장은 피폭 당사자, 권 위원장은 피폭자 2세다. 참배 뒤 윤 대통령은 이들에게 인사했다.  
 
이도운 대통령실 대변인은 히로시마 현지 브리핑에서 이번 참배에 대해 “두 정상이 한·일 관계의 가슴 아픈 과거를 직시하고, 치유를 위해 함께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특히 두 정상의 참배에 우리 동포 희생자가 함께 자리한 것이 그 의미를 뒷받침했다”고 말했다. 또 “동북아 더 나아가 국제사회에서의 핵 위협에 두 정상, 두 나라가 공동으로 동맹국인 미국과 함께 대응하겠다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라고 부연했다. 
 
두 정상이 참배한 위령비에는 원폭 희생자의 원한과 증오가 사라질 것을 기원한다는 내용과 함께 한국과 일본이 가까운 이웃으로 화친하길 바란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참배에는 박진 외교부 장관, 조태용 국가안보실장, 윤덕민 주일본 한국대사 등이 함께했다. 일본 측에선 하야시 요시마사 외무대신, 기하라 세이지 관방부 장관 등이 자리했다.
 

G7 정상회의 참관국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21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어 히로시마 한 호텔에서 한·일 정상회담을 가졌다. 지난 7일 서울 회담 이후 2주 만이다. 윤 대통령은 모두발언에서 “우리가 함께 참배한 것은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 대해 추모의 뜻을 전함과 동시에 평화로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우리 총리님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난 방한에서 기시다 총리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가혹한 환경에서 고통스럽고 슬픈 경험을 하게 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말한 것은 우리 대한민국 국민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며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신 총리의 용기와 결단을 매우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기시다 총리는 “윤 대통령 부부와 함께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기도를 올렸다”며 “이것은 한·일관계에서도,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두 달 사이에 한일 정상회담이 세번 열리는 것에 대해 “한·일 관계의 진전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대통령실은 양국 정상의 ‘실천·행동’에 의미를 뒀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위령비 공동 참배로 일본이 과거사에 진전된 입장으로 바뀐 것이냐’는 질문에 “그동안 한일 양국이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말 위주로 해왔다면 이번에는 실천한 것”이라고 답했다. 이어 “두 정상이 말이 아닌 행동을 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러나 과거사 문제가 일단락됐느냐는 것은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느냐”라며 “역사라는 것은 긴 세월 동안 축적된 것이고, 거기에 쌓인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또 “여전히 국내에 반일 감정을 이용해 얄팍한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세력이 있고, 일본에도 혐한 감정을 이용해 정치적 이득을 꾀하려는 세력이 있을 것”이라며 “하지만 대다수 한국과 일본 국민은 미래 지향적 한·일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데 대체로 합의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