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총리 “우릴 야멸찬 사람으로”…이 말에 담긴 간호법 與 고심

중앙일보

입력 2023.05.2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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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대한간호협회 주최로 열린 간호법 공포 촉구 기자회견이 끝난 뒤 한 참가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날 윤석열 대통령은 간호법 제정안에 대한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다. 연합뉴스

 
“우릴 참 야멸찬 사람으로 보이게 한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간호법 재의요구권(거부권) 논란을 둘러싸고 최근 참모들에게 툭 던진 말이다. 지난달 더불어민주당이 본회의에서 일방적으로 통과시킨 간호법과 관련해 한 총리는 이같이 말하며 “법 체계상 여러 혼란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서, 야당은 뭔가를 해주려는 것처럼, 우리는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취지의 답답함도 토로했다고 한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야당이 거부권을 예상하면서도 법안을 계속  강행처리하는 이유는 이런 노림수 때문 아니겠냐”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6일 국회에 간호법 재의 요구를 했다. 지난달 양곡관리법을 거부한 데 이어 취임 후 두 번째 거부권 행사다. 윤 대통령은 이날 “간호법은 유관 직역 간의 과도한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며 “사회적 갈등과 불안감이 국회의 충분한 숙의 과정에서 해소되지 못한 점이 많이 아쉽다”고 말했다.
 
결론은 같았지만, 양곡관리법과 간호법 ‘재의요구’를 다룬 국무회의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지난달 4일 양곡관리법을 논의할 당시 윤 대통령의 언어는 더 거칠었다. 당시 윤 대통령은 “농업인과 농촌 발전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전형적인 포퓰리즘 법안”이라며 “시장의 쌀 소비량과 관계없이 남는 쌀을 정부가 막대한 혈세를 들여 모두 사들여야 한다는, 남는 쌀 강제매수법”이라고 직격했다. 정부와 여당은 양곡관리법 재의요구 과정에서 일관되게 ‘남는 쌀 강제매수법’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윤 대통령이 직접 만든 조어(造語)였다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16일 대통령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간호법 제정안 거부권 행사에 앞서 모두발언을 준비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간호법의 경우 윤 대통령은 법안 자체를 비판하기보다는 “국민 건강은 다양한 의료 전문 직역의 협업에 의해 제대로 지킬 수 있는 것(16일 국무회의)”이라며 부작용에 초점을 맞췄다. 당정은 재의요구 직전까지도 간호사의 처우를 개선하는 대체입법을 내놓으며 야당과 협상을 시도했다. 여권 핵심 관계자는 “양곡관리법은 세금이 투입된다는 점에서 부작용이 명확했지만, 간호법은 의료 체계의 문제라 딱 잘라 비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치권 일각에선 단순히 법안의 차이를 넘어, “양곡관리법 거부 뒤 치솟은 부정 여론에 대통령실이 몸을 낮춘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한 총리가 참모들에게 토로했듯 정부와 여당이 “야멸찬 사람처럼 보이는” 거부권 딜레마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것이다.
 
지난달 양곡관리법 재의요구 3일 뒤 발표된 갤럽조사(4월 4~6일 18세 이상 1000명 조사)에서 응답자의 60%가 양곡관리법에 찬성했고, 반대는 28%였다. 윤 대통령의 재의요구 행사에 대해 48%의 응답자가 “좋지 않게 본다”고 했고, “좋게 본다”는 33%에 불과했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장은 “간호법은 윤 대통령이 거부해 얻을 실익도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며 “양곡관리법보다 부정 여론이 더 커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16일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서 열린 현장 간담회에 참석하는 가운데 고려대 안암병원 간호사와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조합원들이 간호법 거부권 행사를 규탄하며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전례를 의식해서인지, 대통령실과 여당은 간호법에 대해 애초부터 재의요구란 말을 쉽게 꺼내지 않았다. 간호법이 본회의에서 통과된 뒤에도 대통령실에서 재의요구는 금기어에 가까웠다. 민주당은 자신들이 여당일 땐 부작용 우려 때문에 처리하지 못했던 법안들을 야당이 되자 부담없이 계속 밀어붙이고 있다. 간호법이 국회로 반송된 날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민주당은 이른바 ‘학자금 무이자 대출법’도 단독 통과시켰다.
 
여권 고위 관계자는 “총선을 앞두고 야당은 계속 법안 공세를 벌여 우릴 속 좁은 정당으로 보이게 만들려 할 것”이라며 “법안마다 현실적 대안과 방어 논리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