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혈통’ 아리안에 대한 환상
21세기 오늘에도 유럽 각국과 인도에서는 아리안의 후손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리안은 왜 인종차별과 나치의 상징이 됐을까. 고대 아리안을 둘러싸고 유럽과 인도에서 100년 넘게 벌어지는 역사전쟁을 들여다본다.
‘귀인’ 뜻하는 인도-이란계 선조
고대 유라시아 첨단문명 전파자
19세기 중반 이후 역사왜곡 시작
영국·독일 등 제국주의 상징물로
최근 서유럽 극우주의의 발원지
우크라전쟁에도 ‘나치문양’ 등장
고대 유라시아 첨단문명 전파자
19세기 중반 이후 역사왜곡 시작
영국·독일 등 제국주의 상징물로
최근 서유럽 극우주의의 발원지
우크라전쟁에도 ‘나치문양’ 등장
영국의 인도 식민지 정당화 수단
이 말을 뒤집으면 영국의 인도 지배는 역사적으로 실재한 아리안족의 귀환이자 정당한 작업인 셈이 된다. 더욱이 영국의 말을 잘 듣는 사람들은 고대 아리안족의 후손이라고 치켜세우면서 일종의 ‘명예 영국인’으로 편입하며 식민지배 이념으로 이용했다.
영국의 이 같은 지배 논리는 고고학 발굴로도 이어졌다. 20세기 초반부터 50년 넘게 인더스 문명을 대표하는 ‘모헨조-다로’의 도시 유적 발굴이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무질서하게 놓인 인골 40여 구가 발견됐는데, 영국 고고학자 모티머 휠러는 이를 두고 인더스 문명이 아리안족의 침입으로 멸망했다고 결론 내렸다.
히틀러가 내세운 ‘우월한 독일인’
영국이 만든 아리안족 환상은 히틀러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위대한 독일 민족을 내세우며 순수한 아리안을 강조했고, 그 유명한 ‘하켄크로이츠(Hakenkreuz)’를 상징으로 동원했다. 히틀러는 갈고리 모양의 이 십자가가 작열하는 태양 또는 힘차게 굴러가는 바퀴를 상징한다고 이해했다. 사실 구부러진 십자가 형태는 신석기시대 이래 여러 지역에서 두루 나타나는 문양이다.
나치는 왜곡된 역사의 합리화 작업에 나섰다. ‘순수한’ 아리안족을 찾는다며 티베트에 고고학자를 파견하기도 했다. 물론 티베트 주민들은 인도-유럽인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나치의 티베트 탐험대는 엉뚱하게도 티베트 불교사원에 있던 ‘만(卍)자’ 문양을 주목했다. ‘卍자’와 나치의 관련을 강조하며 티베트와 파미르고원 같은 지역에 아리안의 원래 고향이 있는 것처럼 선전했다. 최근까지도 서양에서 티베트가 신비로운 명상이나 문화 또는 ‘인디애나 존스’ 같은 영화 소재로 등장하는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하지만 독일의 탐사 목적은 사실 티베트와 같은 아시아 지역에 식민지를 만들기 위한 사전 조사였다는 것도 뒤늦게 밝혀졌다. 히틀러는 인종청소와 함께 아리안의 옛 땅을 되찾아야 한다는 침략의 구실로 아리안설을 이용했을 뿐이다.
페르시아 국호가 이란이 된 이유
인도 또한 ‘아리안 원조’ 논쟁에 합류했다. 아리안족이 원래 인도 아대륙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인도인은 구석기시대부터 외부인과 섞이지 않은 ‘단일한 기원’이라는 학설마저 나오고 있다. 인도의 지리 조건이나 다양한 주민 구성을 무시한 이런 주장은 ‘위대한 인도’를 선전하려는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아리안을 내세우는 또 다른 세력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로 대표되는 슬라브인이다. 히틀러의 나치에 2000만 명이나 숨진 슬라브인의 역공이랄까. 나치가 그토록 추켜세운 아리안인이 유라시아 초원에서 기원했으니 히틀러가 찾아 헤매던 아리안의 후손은 바로 슬라브인이라는 황당한 논리를 내세운다. 이른바 네오나치의 부활인 셈이다.
러시아-우크라 전쟁 속 아리안족
이렇듯 구대륙의 절반 이상은 요즘 다시 아리안을 외치고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잠시 가라앉았지만 코로나 이후에 다시 고개를 들까 우려된다. 지역 간 긴장이 높아지고 서로에 대한 혐오가 강해지면서 아리안을 내세운 갈등과 분쟁이 점점 커지고 있다.
고대 청동기술과 기마술 주인공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등 신기술이 특정한 민족의 전유물이 아니듯 유럽 각국과 인도가 아리안을 자기 민족만의 기원으로 보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다. 실체도 없는 아리안을 구실로 전쟁을 일으키고 타민족을 탄압하는 것은 오늘날의 세계뿐 아니라 고대문명을 극도로 왜곡하는 일이다.
고고학이 증명하듯 아리안은 지역과 집단을 초월하여 새로운 기술과 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았던 사람들이었다. 강력한 전차와 철기로 유라시아 곳곳에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전파했다. 산스크리트어로 『리그베다』라는 위대한 문학도 창조했다. 타민족에 대한 배타주의와 전쟁의 위협이 높아지는 현재와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세계는 지금 역사에서 진정 무엇을 배울 것인가.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