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송호근의 세사필담

[송호근의 세사필담] 통 크게 치고 나가긴 했는데

중앙일보

입력 2023.05.16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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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1876년 1월, 왜(倭)가 왔다. 1천 병력과 기마병, 대포와 회선포로 무장한 12척 전단이었다. 사령관은 메이지 공신인 약관 36세의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아산만 풍도를 지키던 수병(水兵)이 장계를 올렸다. “화륜선 수 척이 검은 연기를 뿜으며 수평선에 나타났습니다. 날이 저물었지만 계속 지켜보겠습니다”(신헌, 『심행일기』). 그게 왜선(倭船)임을 확인하는 데 며칠이 걸렸다. 대부도 첨사가 전함에 쓰인 현무환(玄武丸) 글자를 알아봤다. 조정이 난리가 났다. 왜 왔을까?
 
첫발을 뗀 한일관계 정상화 여정
몸값 땅값 오른 한국 위상 숙고해
자진 양보의 전략적 이점 챙겨야
일본 국회와 내각 답례 끌어낸다
 
강화도 수호조규의 서막이 이랬다. 구로다가 강요한 메이지 정부의 조약문을 접견대관 신헌(申櫶)장군은 삼백 년 교린상경(交隣相敬, 전통적 친교)으로 대적했다. 국제법인 만국공법의 시대에 그것은 구시대의 유물, 역부족이었다. 결국 일본의 강제 요구를 받았다. 멀리 내다본 메이지 정부의 대륙진출 설계도였다. 그 후 양국은 에릭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로 부른 광기에 휘말렸다. 결과는 인류사적 비극. 일본은 잔혹한 가해자, 한국은 참혹한 피해자로 갈렸다. 견원지간이 따로 없었다. ‘이미 정산했음’과 ‘진정한 사죄 없음’이 맞붙어 파열음을 냈다.
 
21세기 일본의 외교 시야는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역사 과오의 지뢰밭인 대륙에 집착하지 않고 남방·서방 진출로 방향을 틀었다. 인도-태평양국가, 영국과 호주, 동남아시아 국가군과 우호 관계를 일궈 나갔다. 제국시대 팔굉일우(八紘一宇)의 현대판과 흡사한데 단지 군국주의가 제거된 경제·안보 네트워크다. 지난 십 수년간 한국이 반일(反日)로 치닫는 동안 아베 전 수상이 닦아놓은 자민당의 혁신 외교다. 국제적 운신의 폭을 넓히고 첨예한 미중(美中) 갈등에서 한 발짝 비껴서는 신(新)설계도를 후임자 기시다 총리가 과연 버렸을까?
 
한국은 일본의 신설계도에서 어디쯤 위치하고 있는가? 북한 핵위협을 막아주는 유용한 국가, 일본의 세계진출을 훼방놓지 않는 만만한 국가 정도면 족하다. 토착왜구, 죽창가를 불러제끼면 못 본 체해도 그만이다. 답답할 게 없다. 그런 일본에 윤석열 대통령이 물꼬를 터줬으니 내심 반갑기 그지없을 거다. 기시다 총리가 달려온 이유다. 과거사에 묶여 미래협력을 망치지 말자는 윤 대통령의 대승적 제안에 눈이 번쩍 뜨였을 것이다. 그런데 기시다 총리가 들고 온 것은 ‘개인적 차원’의 심경 토로였다. “(많은) 분들이 힘들고 슬픈 경험을 하신 데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기자 질문에 대한 즉석 대응, 단지 첫발을 뗀 거다.


뜻밖의 유감 표명에 윤 대통령은 한숨 돌렸을 터이고, 한국민은 부족하나마 성의를 느꼈을 것이다. 우익언론 산케이 신문이 지난 3월 윤 대통령의 결단에 호의를 표한 것을 보면 일본 여론도 긍정적 기류다. 며칠 후 기시다 총리와 윤 대통령이 히로시마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함께 참배한다고 한다. G7 정상이 지켜볼 것이니 분위기는 괜찮다. 혹 비난이 돌출해도 기시다 총리는 이렇게 얘기할 거다 - ‘토착왜구를 절창하는 한국을 신설계도에 끌어들였다’.
 
‘가슴 아픔’ 발언과 동반 참배가 독도 분쟁, 징용자 제3자 변제, 위안부 문제를 푸는 단초가 될 수 있을까. ‘자진 양보’의 전략적 이점은 뭘까. 접견대관 신헌도, 조약 타결을 치하했던 고종도 일본이 숨긴 수(手)를 몰랐다. 백 오십 년 후, 윤 대통령의 담대한 관용 외교 역시 그런 오류에 휘말리는 것은 아닌가. 이런 때 민간의 노력은 든든한 원군이 된다.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과 기시다 총리 간 공식 대담이 그렇다(중앙일보 15일자). 홍 회장은 그 자리에서 일본의 호응 조치를 주문했고, ‘한일 현인회의’를 제안해서 호의적 답변을 끌어냈다.
 
한국이 도덕적 우위를 점하기엔 때가 늦었기에 실속 챙기기가 중요하다. 문을 열어줬으니 일본 국회나 내각 차원의 답례를 끌어내는 것, 한껏 치솟은 한국의 몸값과 땅값을 제대로 따지는 것 등. 한 세기가 넘는 역사적 격랑에서 국제적 세력 구도는 한국에 대륙과 해양의 가교역할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도 1876년과 확연히 다른 점은 한국의 ‘몸값’이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이다. 반도체와 제조업 강국인 한국은 전함 수십 척으로 밀어붙일 나라가 아니다. 땅값도 치솟았다. 세계의 무력 60%가 포진한 주변 정세에서 한국은 대륙과 해양의 군사적 충돌을 관리하는 국가다. 역으로 중국과 북한이 결코 삭이지 못하는 역사적 원한을 공유하는 국가다. 군사와 역사 충돌선 중간에 끼였다. 딜레마가 오히려 이점이 된 알박이 땅이다. 몸값과 땅값을 더 올릴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은 좌우 진자운동을 거듭했다. 일본은 이 진자운동에 질린 상태다. 후세대가 짊어질 역사적 부담을 없애겠다는 자민당의 완강한 원칙에 부딪혀 무작정 관용 외교의 머리가 깨지면 다시 죽창가를 불러야 하나, 어디에 가서 하소연할 것인가.
 
멋지게 치고 나가긴 했다. 그래서 묻는다. 빈손의 신헌은 달리 방도가 없었지만, 본의 아니게 알박이가 된 나라의 통수권자 윤 대통령은 통 큰 양보로 무엇을 얻어 낼 것인가.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