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사장은 이날 ‘전기요금 정상화와 관련해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의 입장문을 통해 “오늘(12일) 자로 한전 사장직을 내려놓고자 한다”며 밝혔다. 여권에서 한전 경영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장이 물러나야 한다고 요구한 지 15일 만이다. 정 사장은 한국가스공사 사장과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을 거쳐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1년 5월 한전 사장으로 임명됐다. 아직 임기가 1년 남아있지만, 한전이 ‘뼈를 깎는 쇄신’을 요구받는 상황에서 사퇴를 선택했다.
‘창사 이래 최대’ 25조원 규모 자구안…가스공사도 동참
우선 수도권 대표자산인 여의도 남서울본부를 매각하고, 매각이 여의치 않은 강남 한전아트센터는 3개층을 임대하기로 했다. 한전은 “기존 재정 건전화 계획상 매각 대상 44개소 외에도 ‘매각 가능한 모든 부동산을 매각한다’는 원칙”이라며 “추가 임대자산도 지속 발굴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임직원 급여·성과급도 일부 내놓기로 했다. 2직급(부장급) 이상 임직원은 임금 인상분 100%를, 3직급(차장급) 이상 임직원은 50%를 반납한다. 성과급도 경영평가 결과가 확정되는 다음 달에 1직급(실장급) 이상은 전액, 2직급 이상은 50% 반납하기로 했다. 4직급 이하 전 직원도 노사 협의를 거쳐 급여 반납에 동참하도록 독려할 예정이다. 이외에도 조직 효율화 차원에서 인력을 재배치하고, 전력 구입비도 줄여나가기로 했다.
이날 한국가스공사도 15조4000억원 규모의 추가 자구안을 발표했다. 한전과 마찬가지로 임직원 임금 인상분을 반납하고 국내 가스 수급 안정에 직접 영향이 없는 사업비는 이연하거나 축소하기로 했다. 최연혜 가스공사 사장은 “가스요금과 관련해 국민 여러분에게 부담을 드려 송구하다”며 “앞으로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강도 높은 자구 노력을 이행해 국민의 요구와 기대에 부응하는 공기업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말했다.
‘38조 적자’ 메꾸기 부족한 자구안…‘임금 반납’ 노조 반발 예고
이번 자구안이 오히려 부작용을 야기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창의융합대학장은 “예컨대 매각 대상인 남서울본부는 지금도 한전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는데, 만약 매각 이후 사무실을 임대해서 쓰게 된다면 ‘조삼모사’가 될 수 있다”며 “당장은 큰 목돈이 들어올 수 있지만, 길게 보면 오히려 국가적으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결정”이라고 짚었다.
4직급 이하 임직원의 임금 반납 독려도 벌써 거센 내부 반발에 직면하고 있다. 전국전력노조 함규식 사무처장은 “우선 사측 협의 요청은 거부했다. 안 그래도 ‘방만 경영’ 프레임으로 몰아가서 직원 사기가 떨어져 있는데, 2%도 안 되는 인건비마저 일부 반납하자고 조합원들을 설득할 명분이 없다”며 “국민 부담을 줄이자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방법이 잘못됐다고 생각해 내부 대응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 “전기요금 현실화가 먼저”
강천구 인하대 에너지자원공학과 초빙교수는 “강더위가 예고된 여름철이 다가오기 전에 전기요금을 최소 1분기 인상 폭(13.1원)보단 크게 올려야 한다”며 “3·4분기로 갈수록 총선 이슈와 맞물리면서 인상은 더욱 힘들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전기요금 현실화는 적자 경영을 해소하는 측면도 있지만, (높은 인상을 통해) 국민에게 에너지 위기 심각성을 알리고 절약을 유도하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유승훈 학장도 “한전이 방만해서 생긴 문제가 아닌데도 자구 노력만 요구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 밖에 되지 않는다”며 “적자 해소를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결국 전기요금을 현실적인 수준으로 올리는 것이다. 정치 논리를 배제하고 인상 폭을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