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석천의 컷 cut

[권석천의 컷 cut] ‘고생깨나’ 한 사랑도 마침내, 사랑일까?

중앙일보

입력 2023.04.28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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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영화 ‘헤어질 결심’은 변사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해준(박해일)과 변사자의 중국인 아내 서래(탕웨이)의 아슬아슬한 러브라인을 그리고 있다. 영화엔 주요 장면은 아니지만 흥미로운 추격 신 하나가 나온다. 해준이 살인범 산오(박정민)를 뒤쫓는 장면이다.
 
숨 가쁘게 쫓고 쫓기던 두 사람이 연립주택 옥상에서 대치한다. 산오는 죽음을 결심한 듯 흐느끼며 말한다. “가인이한테 ‘나 너 때매 고생깨나 했지만 사실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 요렇게 좀 전해주세요.” (※산오는 가인이 때문에 “죽음보다 더 무서워하던” 감옥에 갔다 왔고, 살인까지 했다.)
 

컷 cut

‘너 때문에 고생깨나 했지만/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고? 이 말은 앞뒤가 잘 연결되지 않는다.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감정, 즉 원망과 사랑이라는 양가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고생깨나 시킨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여기엔 함정이 있다. 그가 ‘고생깨나’ 한 것은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 아닐까. 생각해보라. 고생깨나 시킨 것은 가인이가 아니라 가인이를 사랑했던 산오 자신이다. 이 사실은 ‘사랑’이란 두 글자에 만남의 설렘이나 기쁨만이 아니라 고통도 내장돼 있음을 말해준다.


보고 싶어 잠 못 들던 날들도, 애태우고 속 끓였던 과정도, 그 사람 때문에 갈림길에 서야 했던 기억도 서래의 대사를 빌리자면 “마침내”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생깨나 했지만’은 순정을 다 바쳐서 사랑했다는 강조의 표현이 되고, “너무 쉬운 사랑은 다 거짓말”(버스커버스커)이 아닌지 묻게 만든다.
 
○○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 당신이라면 ○○에 누구를, 무엇을 넣을 것인가. 자녀? 배우자? 연인? 종교? 돈? 직장? 아이돌? 중요한 건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내 인생 공허하지 않았다”고 외칠 만한 그 무언가가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 있느냐다.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