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오후 경기도의 A 전력 기기 생산 업체. 공장 바깥의 넓은 공간엔 파란색으로 포장된 자재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한국전력에 납품할 제품용 자재인데, 한전의 발주가 줄면서 별일 없이 놀리고 있다. 완제품 일부도 4개월째 한전으로 보내지 못해 한쪽에 놓여있었다. 이 회사의 김모 사장은 "보통 마당에 자재를 한 달 정도 보관했는데 요즘엔 그보다 더 길게 두고 있다"면서 "완제품으로 미리 만들어도 소용이 없다. 다 만들어놓고 쌓아두는 판"이라고 말했다.
공장 내부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나마 수출용 제품을 만드는 라인엔 10명 가까운 근무자가 몰려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한전용 제품 제조 라인엔 두 명밖에 없었다. 제작 중인 기기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김 사장은 “한전 라인의 직원을 수출 라인으로 돌리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한전 협력업체 고사에도…2분기 전기료 기약 없어
대부분 중소기업인 이들은 한전이 32조6000억원 넘는 적자를 낸 지난해 이후 발주·대금 결제 등에서 큰 차질을 빚고 있다. 꾸역꾸역 버티고 있지만, 한전 적자가 이어질 올해 상황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기에 원자잿값 인상·인건비 상승·고금리까지 겹친 '사중고'로 전력망 유지를 위한 실핏줄이 줄줄이 터져나갈 위기다.
"공사를 해도 한전의 비용 결제는 안 되고, 적자만 쌓여갑니다. 이미 하고 있던 공사도 중지될 정도입니다. 멈추고 싶어도 다들 국민 안전을 지킨다는 사명감으로 버텼지만, 주변에서 '이젠 놓자' 이야기까지 나오네요."
24일 중앙일보 기자와 만난 배전 공사 전문 업체 B사 대표는 한숨을 쉬었다. 그 옆에 있던 같은 업계 C사 직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작년이 최악인 줄 알았는데 올해가 더 최악입니다." 배전 공사는 변전소와 소비자 사이에서 전기를 연결해주기 위한 작업으로, 전신주나 전기 선로 설치·보수가 대표적이다.
"결제 7개월 밀려" "하던 공사도 중지될 정도"
심지어 한전 지사에서 공사 발주 등 목소리를 내달라고 협력업체에 부탁할 정도라고 한다. B사 대표는 "각 지사에서도 문제점을 잘 알지만 '우리가 힘이 없으니 (협력업체가) 본사에 바로 말하라'고 한다"고 전했다.
기기 납품 업체도 벼랑끝 "적자에 적금 다 깼다"
송전선로 부품을 공급하는 D사 대표는 한전 납품 등 내수 중심이라 매출 타격이 크다. 그는 "30년간 회사 운영하면서 지금이 제일 큰 위기다. 지난해엔 90년대 후반 외환위기 때도 겪지 않은 수십억 원 적자를 냈다"면서 "부동산ㆍ적금ㆍ보험 등 팔 수 있는 건 다 팔거나 해약하고 이젠 남은 게 전혀 없다. 50명 가까이 있던 직원도 30명 수준으로 확 줄었고, 경기 하락ㆍ물가 상승ㆍ인건비 요동ㆍ발주 하락이 겹쳐 희망이라곤 안 보인다”고 말했다. “업체 10곳 중 8곳이 어려워서 하반기 넘기기도 쉽지 않다. 자칫하면 부도 위험이 곧 대두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차단기 등을 만드는 A기업은 해외 수출 덕분에 그나마 사정이 낫지만, 한전 물량이 적으면 생존 자체가 어렵다고 했다. 한전이 적자를 낸 2021~2022년에 이 회사도 사실상 ‘마이너스’(-) 실적을 받아들었다.
한전 예산 부족에 안전 우려…'대정전' 같은 부메랑 경고
국내 전력 계통의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꼽힌다. 업계 관계자들도 그러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업무를 진행해왔다. C사 직원은 “한국이 세계적으로 전기 품질에서 최고로 꼽히는 건 협력업체들의 시공 능력, 안전 관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전력 생태계가 흔들리면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국민 안전 저하’나 ‘대정전’ 같은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B사 대표는 “전신주가 넘어질 상황이라 긴급 보수 공사가 필요한데도 한전에선 ‘예산 없다’면서 못 하게 할 정도”라고 말했다. C사 직원은 “업체가 당장 힘드니 장비ㆍ인력 투자를 안 해 품질과 안전 저하라는 악순환에 빠진 상황”이라고 전했다. D사 대표는 “원자잿값은 오르는데 단가ㆍ물량이 적으니 중국산 저가 부품을 갖다 쓰는 업체도 있다. 부품 수명이 짧아지고 선로 오류가 늘어나는 만큼 모두가 손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한전은 "안전과 안정적 전력 공급을 위한 투자와 예산 집행은 차질없이 지속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올해를 못 넘기는 업체가 급증하면 ‘줄도산’ 등으로 전력 업계 안정성이 크게 떨어질 거란 데엔 모두가 입을 모았다. A기업 사장은 "업계에선 인건비라도 건지려고 저가 수주에 나서는 곳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출혈이 크다 보니 2~3년 뒤엔 결국 문을 닫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력 기기 수출 덕분에 ‘위기’ 상황은 아니라는 E사 대표도 “이런 식으로 가면 전력 업계에 큰 위기가 올 것”이라고 밝혔다.
"답은 빠른 전기료 현실화뿐…당정이 국민 설득해야"
이처럼 한전의 재무 부담은 한전에만 그치지 않는다. 전력망 투자가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 노후화로 전력 공급이 불안정해지고, 정부가 추진하는 여러 첨단 산업단지 조성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 전력 다(多)소비국인 한국의 산업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얘기다. 인위적으로 요금을 억누른 데 따른 ‘나비효과’다.
조홍종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미 전력 산업과 시장의 고사가 진행 중이다. 전력 산업 붕괴는 국내 산업 생태계 전반의 위기로 넘어갈 것"이라면서 "전기료를 현실화하는 한편 에너지 요금을 독립적으로 결정할 위원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