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후 7시 인천시 미추홀구 주안역 광장. 검은색 옷을 입은 안상미 미추홀구전세사기대책위원회(피해대책위) 위원장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안 위원장은 “정부가 만들어놓은 제도 안에서 믿고 전세 계약을 맺었는데 (전세 사기로) 저뿐만 아니라 미추홀구 일대가 쑥대밭이 됐다”며 “할 순 있는 건 집이 낙찰되면, 그나마 최우선변제금 받을 수 있으면 그걸 받고 쫓겨나는 것뿐이다”라고 했다. 그는 “전세 사기 피해자들이 자살할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만들고 지원받을 수 없게 한 건 정부다”며 “전세 사기는 지금도 전국 방방곡곡에서 터지는 사회적 재난”이라고 외치면서 울먹였다.
이날 주안역 광장에서는 미추홀구 전세 사기로 사망한 피해자를 기리는 추모제가 열렸다. 광장 한 곳엔 놓인 탁자엔 고인을 기리는 촛불과 국화꽃이 놓였다. 참석자 100여명은 대부분 수도권 거주 피해자들이었는데 간혹 지방에서 온 참석자도 보였다. 자신을 제주 전세 사기 피해자라고 밝힌 김연신(53)씨는 “집주인이 전세금을 안 주려고 위장 이혼을 했다. 전세사기 피해를 입었는데 국가조차 처벌을 외면해 막막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일부 피해자들은 ‘제도와 정책을 믿었더니 남은 건 빈털터리 신불자’, ‘사기꾼은 결혼식, 피해자는 장례식’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목소리를 보탰다.
추모제에 참석한 이철빈(29·빌라왕 피해대책위 활동)씨는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없어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좌절감과 경매가 진행돼 거리로 내몰리거나 대출연장이 거부돼 신용 불량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피해자를 옥죄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11월 전세계약이 만료되는 이씨는 전세금 일체를 돌려받지 못할 상황이라고 한다.
낙찰이 이뤄지지 않으면 퇴거 압박에 시달리진 않지만, 집이 경매에 넘어가면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처지에 놓인다. 18일 피해대책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11일 기준 피해대책위에 가입된 34개 아파트·빌라의 1787세대 가운데 1066세대(59.6%)가 경매·공매에 넘어갔다. 법원경매정보업체 지지옥션 통계를 보면 최근 미추홀구 숭의동 일대 주거시설 경매 낙찰가율은 올해 들어 50∼60% 선에 그쳤다. 선순위 근저당이 설정돼 있고, 세입자가 끼어 있어 권리관계가 복잡해 유찰을 거듭하다가 최저가가 감정가의 반값 이하로 떨어진 뒤에야 주인을 찾는 것이다.
이 때문에 피해자들 사이에선 “전세금을 잃고 신용불량자가 될 수도 있다”는 공포가 퍼지고 있다고 한다. 지난 2월 28일 미추홀구 한 빌라에서 보증금 7000만원을 받지 못한 30대 전세 사기 피해자가 극단선택을 했고 지난 14일엔 전세 사기 피해자 임모(26)가 미추홀구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17일엔 전세 사기 피해자 박모(31)씨가 자택에서 세상을 등졌다. 박씨의 이웃 김병렬(44)씨는 “김씨가 사는 아파트에선 60가구 중 20가구가 법원 경매에서 낙찰됐다. 안타까운 소식이 잇따르면서 피해자 대부분이 큰 상심에 빠져있다”고 울먹였다. 안상미 위원장은 “제가 사는 아파트 104세대 중 103세대가 전세 사기 피해자다. 사회적 재난의 현장이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날 윤석열 대통령이 전세 사기 피해자들의 부동산 경매 일정을 중단하는 방안을 시행하라고 했지만, 피해자들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경매 일정이 언제 중단이 될지 구체적인 계획이 공개되지 않은 탓이다. 피해대책위에서 활동 중인 최은선씨는 “정부 발표 이후 ‘이제 살 수 있는 거냐’라는 피해자의 문의가 잇따르는데 대답을 못 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사집행법에 따르면 채권자의 경매신청 취하 또는 변제기 유예증서 등이 없는 한 법원은 임의로 경매절차를 중단할 수 없다. 대책위도 이날 추모제에서 “대통령실의 발표 내용이 한국자산관리공사뿐만 아니라 모든 시중은행에 적용되도록 추가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호소했다. 대책위 활동을 돕고 있는 김주호 참여연대 간사는 “경매를 멈추기 위해선 은행들과 협의해야 하고 진행 중인 경매는 법원에서 매각 기일을 늦춰야 중단할 수 있다. 실질적 변화가 나타나기까진 상황을 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