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8월 9일 세상을 떠난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사회주의 관제(官制) 추모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추모사만 놓고 보면 쇼스타코비치는 공산정권 치하에서 온갖 영화를 누리다 간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이와 정반대였다. 그는 인민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곡을 쓴다는 이유로 스탈린의 눈 밖에 나서 평생 온갖 박해를 받은 사람이다.
1945년, 히틀러를 이기고 나서 스탈린은 기세등등해졌다. 그래서 쇼스타코비치에게 관현악과 합창, 독창이 들어가는 지도자에게 바치는 찬가를 4관 편성으로 쓰라고 명령했다.
때는 쇼스타코비치가 마침 제9 교향곡을 쓸 차례였다. 스탈린은 그 ‘9’라는 숫자가 마음에 들었다. 베토벤의 ‘합창’에 버금가는 교향곡을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합창도 없고 독창도 없고 찬가도 없었다. 스탈린에게 바치는 헌사도 없었다. 대신 조롱조의 멜로디가 가득했다. 스탈린은 속이 쓰렸지만 ‘대놓고’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쇼스타코비치가 ‘대놓고’ 그를 조롱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다른 장르의 예술보다 편한 면이 있다. 추상적인 방식으로 ‘은근히’ 상대를 깔 수 있기 때문이다.
진회숙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