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국민의힘이 지난달 31일 당정협의회에서 2분기 전기·가스 요금 인상을 보류하자 요금 인상을 기대한 한전은 난처해졌다. 전기를 팔아 원가의 70%밖에 회수하지 못하는 한전은 지난해 32조6000억 원의 적자를 냈다. 올해도 상반기에만 10조 원 넘는 적자를 예상한다. 한전은 한 달에 네 차례에 걸쳐 발전사에 전기를 구매하고 그 대금을 지급해야 한다.
5일 한전에 따르면 3월 말 기준 한전채 발행 잔액은 68조300억원으로 집계됐다. 1년 전 잔액(39조6200억원) 대비 72% 늘었다. 1분기 기준 발행액(8조100억원)이 1년 전 발행액(6조8700억원) 대비 17% 늘었다. 1월 발행액은 역대 최대 규모였던 지난해 11월(4조300억원), 12월(3조8700억원)에 이어 세 번째다.
마침 ‘멍석’도 깔렸다. 국회는 지난해 말 한전법을 개정해 한전채 발행 한도를 자본금과 적립금을 더한 규모의 기존 2배에서 5배로 올렸다. 경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긴급 상황에선 산업부 장관의 승인으로 한도를 6배까지 늘릴 수 있도록 했다. 김상만 하나증권 채권팀장은 “전기요금을 추가 인상하지 않고, 매달 3조원씩 한전채를 발행한다면 (일부 채권의 만기가 도래한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올해 한전채 잔액이 90조원을 돌파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문제는 한전채가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간단치 않다는 점이다. 한전채는 일반 회사채와 달리 정부가 지급을 보증한다. 신용등급은 초우량 등급인 트리플A(AAA)다. 한전채가 ‘국민채(債)’로 불리는 이유다. 지난해 국내에서 발행한 채권 물량의 4.8%. 회사채 발행량의 45.6%가 한전채였다.
금리가 높고 신용등급도 최상위인 한전채로 투자 수요가 쏠리면 일반 기업이 발행하는 A급 이하 회사채는 더 높은 금리를 제시해야 한다. 해당 회사는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특히 최근 글로벌 은행 위기 이후 채권시장이 냉각된 상황에서 한전채로 ‘머니 무브(money move)’가 일어나면 일반 회사채가 외면받는 ‘구축효과’가 심화할 수 있다.
김기명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투자자 입장에서 한전채가 다른 회사채나 카드채와 신용도·금리가 비슷하다면 (한전채를) 살 수밖에 없다”며 “결과적으로 한전의 대규모 적자가 경제 전반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지난해 10월 ‘레고랜드 사태’ 직후 회사채 투자 심리가 급격히 위축하자 신용도가 높은 한전채·은행채로 수요가 급격히 몰렸다. 일반 기업은 회사채로 자금을 조달할 수 없어 자금난을 겪었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에너지정책학과 교수는 “적정 수준의 한전채 발행을 유도해 금융시장 혼란을 막되 결국 전기요금을 인상해 적자를 줄일 퇴로를 열어줘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