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은 1차 구속영장 청구 당시 ‘1테라=1달러’ 가치 고정을 위한 수요·공급 조절용 자매코인 루나가 자본시장법상 투자계약증권에 해당한다는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6일 테라폼랩스 업무총괄팀장 유모씨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도 “루나 코인이 자본시장법상 투자계약증권인지 여부 등에 대해 법리상 다툼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며 기각했다.
이 때문에 검찰은 그간 보강 수사를 통해 법리 논쟁의 여지가 없는 혐의를 추가해 왔다. 신 대표의 회사인 차이홀딩스가 테라를 블록체인 기반 지급결제 수단으로 거짓 홍보하고, 복수의 투자사로부터 주식 투자를 받았다는 내용 등(사기, 자본시장법 위반)이 골자다.
동시에 검찰은 지난 영장실질심사 때 ‘루나가 투자계약증권에 해당한다’는 데 대한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보고, 법원을 설득할 수 있는 배경지식과 법리 보강에도 심혈을 기울여 왔다. 이번 사건은 한국 형사법 사상 암호화폐에 대한 증권성 여부를 판단하는 최초 사례라 업계는 물론 법조계도 주목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우리는 루나가 증권이라고 보지만, 설사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기죄라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증권성, 그게 뭔데
부동산 개발회사 하우이는 플로리다 감귤농장을 투자자들에게 나눠 매각한 뒤 감귤 판매수익을 배분하는 사업을 했다. 법원은 이 같은 위탁관리계약이 불법 증권거래라며 금지명령을 청구한 SEC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금전의 투자 ▶공동사업 ▶타인의 노력에 따른 이익의 기대 등 투자계약증권의 요건을 제시했다.
SEC는 지난 16일(현지시간) 테라·루나도 이 같은 요건을 충족한다며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 등을 연방 증권거래법상 사기 및 미등록 증권 판매 혐의로 뉴욕남부연방지법에 제소했다. 투자자들이 ▶금전을 투자해 테라·루나를 취득했고 ▶이는 ‘테라 생태계’라는 공동사업에 투입됐으며 ▶권 대표가 주도하는 테라폼랩스의 노력으로 안정적 이익을 기대했다는 것이다.
미 뉴욕남부연방지검도 지난 23일(현지시간) SEC와 유사한 판단에 따라 권 대표를 증권 사기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미 수사당국은 ▶테라폼랩스가 테라를 지급결제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투자자들을 기망해 투자를 받곤 ▶지속적인 홍보를 통해 테라 수요를 늘려 루나 가치를 띄웠으며 ▶테라폼랩스가 개발한 알고리즘이 아닌 인위적인 노력과 투자 유치로 테라의 안정성을 확보했다고 보고 있다. 이는 한국 검찰이 수사한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증권성, 왜 중요한데
당초 암호화폐 관련 논쟁은 암호화폐를 범용 화폐로 인정할 수 있는지였다. 정부는 이에 대한 판단을 미룬 채 수년간 암호화폐 거래를 방치해 오다 사기 등 범죄 피해가 커지자, 2018년 박상기 당시 법무부 장관이 돌연 암호화폐 거래를 도박에 비유하면서 거래소 폐쇄 방침을 밝혔다가 번복하는 등 우왕좌왕했다. 이후 국회 논의를 거쳐 2020년 3월 암호화폐거래소 신고제 도입과 자금세탁방지 의무를 부과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특정금융거래법 개정안이 통과하면서 암호화폐의 법적 개념은 화폐가 아닌 ‘가상자산’으로 정리됐다.
하지만 비트코인·이더리움과 같은 단순 자산이 아니라, 의결권이나 수익 등 일정한 권리를 부여하는 암호화폐의 경우 미국·스위스·싱가포르처럼 ICO(암호화폐공개)를 허용하지도 않고 증권으로 규제하고 있지도 않아 투자자 보호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외국에 법인을 세우고 ICO를 진행해 국내 투자를 유치하는 우회로가 형성되는 동안, 이러한 자금 조달 방식에 대한 규제는 전무해 일종의 사각지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미국은 어떤데
앞서 SEC는 2020년 12월 암호화폐 리플을 발행한 리플랩스를 13억 달러 이상의 미등록 증권 판매 혐의로 제소했다. SEC는 리플이 하우이 기준에 따른 투자계약증권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지만, 리플랩스 측은 투자자들과 투자 계약을 체결한 적이 없다며 리플을 증권으로 볼 수 없다고 맞서고 있다. 김경환 변호사(법무법인 민후)는 “리플 사건에 대한 법원 판단이 향후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암호화폐 규제에 관한 이정표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한국에선 어떻게
김경환 변호사는 “테라·루나 사태가 발생한 건 규제당국이 그동안 손을 놓고 있었던 탓”이라며 “현재 정부의 규제 움직임은 늦었지만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으로, 건전한 암호화폐 생태계 조성을 위해선 신속한 입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정엽 변호사(법무법인 LKB앤파트너스)는 “현재 한국의 입법이나 규칙 제정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며 “투자자 보호를 위한 입법이 필요한 건 두말 할 나위도 없지만, 자본시장법을 그대로 적용하는 게 맞는 방향인지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