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상속 포기에 할아버지 빚 떠안은 손주…이런일 더는 없다

중앙일보

입력 2023.03.24 00:01

수정 2023.03.24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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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빚의 대물림의 고리를 끊는 판결을 내놨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23일 전원합의체 선고에서 “고인의 자녀 전부가 상속을 포기하면 손자녀나 직계존속이 있더라도 배우자만 단독 상속인이 된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2015년 대법원 3부(주심 권순일 대법관)의 판결 등 종래 판례를 변경한 것이다. 이 판결로 고인이 남긴 빚이 자녀들이 상속을 포기했음에도 손자녀에게 대물림되는 일을 최소화할 수 있게 됐다.
 
2015년 A씨가 빚을 남기고 숨지자 자녀들은 상속 포기를, A씨의 배우자는 자신이 받을 수 있는 재산 한도 내에서만 빚을 갚는 한정 승인을 신고했다. 그러자 A씨에게 받을 구상금 채권을 가지고 있던 서울보증보험은 2020년 A씨 배우자와 손주 4명에게 빚을 갚으라는 승계집행문을 법원을 통해 보냈다. 상속 포기 신고를 하지 않은 손주들은 A씨 배우자와 함께 공동상속인이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손주들은 A씨가 숨질 당시 미성년이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손주들은 “할머니가 단독 상속한 것으로 봐야 한다”며 이의를 제기했지만 부산지방법원은 2020년 5월 기각했다. “배우자와 자녀 중 자녀 전부가 상속을 포기한 경우에는 배우자와 손자녀 또는 직계존속이 공동으로 상속인이 된다”고 밝힌 2015년 대법원 판결이 근거였다.
 
이는 배우자에게 독자적인 상속인 지위를 주지 않은 한국 상속 체계에 뿌리를 둔 문제다. 법률상 배우자는 고인의 직계비속이나 직계존속이 있는 경우 이들과 함께 공동상속인이 되고, 직계비속이나 직계존속이 없는 경우에는 단독 상속인이 된다(민법 제1003조). 2015년 대법원 판결은 민법 조항을 글자 그대로 해석한 결과다.


하지만 전원합의체 다수의견은 2015년 판결이 법 조항을 지나치게 좁게 해석했다고 판단했다. 민법 제1043조에는 “어느 상속인이 상속을 포기한 때에는 그 상속분이 ‘다른 상속인’의 상속분의 비율로 그 상속인에게 귀속된다”고 규정돼 있는데 대법원은 그동안 ‘다른 상속인’에 배우자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해석해 왔다. 이날 전합은 ‘다른 상속인’에 배우자가 포함된다고 해석해 A씨 사건과 같은 경우에 빚을 배우자가 단독 상속하고 손주들에게 대물림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다만 만약 고인의 배우자와 자녀가 모두 상속을 포기했다면 손주들은 별도로 상속 포기 절차를 밟아야 대물림을 차단할 수 있다. 하지만 배우자가 한정승인으로 빚을 감당하는 게 일반적이어서 이날 판결로 빚이 손자녀에게 대물림되는 고리는 거의 차단된 셈이다. 전합은 “손자녀 또는 직계존속에게 별도로 상속 포기 재판 절차를 거치는 과정에서 채권자와 상속인 모두에게 불필요한 분쟁을 증가시키며 무용한 절차에 시간과 비용을 들이는 결과가 됐다”고 지적했다.
 
윤진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일본은 이미 한참 전에 자녀가 모두 상속을 포기한 경우 배우자의 단독 상속을 인정하는 쪽으로 법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판례가 바뀌면서 관련 분쟁이 훨씬 간명해질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부광득 변호사(법무법인 태평양)는 “한 사건에 상속 포기자가 3~40명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며 “빚이 많은 서민이 법률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도 어려운 현실을 고려하면 전합 판단은 일반인의 법감정과 부합하는 결과”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