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기름값 뒤엔 불길한 그림자

중앙일보

입력 2023.03.17 00:03

SNS로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가파르게 내려가기 시작한 국제유가와 국채 금리, 하루가 멀다하고 올랐다 내렸다 널뛰는 주가와 환율.’
 
미국 중소은행인 실리콘밸리은행(SVB)에서 시작해 스위스 2위의 초대형 투자은행인 크레디트스위스(CS)로 확산한 은행 위기에 시장은 이처럼 혼돈에 빠졌다. 지표 움직임이 가리키는 방향은 하나다. 누적된 고물가 충격이 더 무서운 경기 침체를 불러올 수 있다는 신호다.
 
한국석유공사 페트로넷에 따르면 15일(현지시간) 미국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가격은 배럴당 67.61달러로 내려앉았다. 하루 사이 6% 가까이 하락하며 배럴당 70달러 선 밑으로 추락했다. 일일 낙폭으로는 8개월여 만에 최대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이날 국제유가는 지난해 12월 이후 최저치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기 전 가격으로 돌아갔다. 이날 포브스는 “미국 지방은행은 물론 유럽 CS 같은 초대형 은행까지 무너질 수 있다는 공포가 국제유가를 떨어뜨렸다”고 밝혔다. 미국을 포함한 세계 경제가 가라앉으면서 석유 소비가 감소할 것이라는 데 시장이 ‘베팅’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CNBC는 “미국 지방은행 파산에 따라 시장 변동성이 심해지면서 경기 위축이 더 빠른 속도로 이뤄질 것이란 전망이 우세해지고 있다”며 “은행 대출이 줄어들 것이란 예상 하에 성장률 전망치가 하향 조정되고 있다”고 전했다. 골드만삭스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 사업 대출의 50%, 부동산 대출의 80%를 자산 2500억 달러(약 330조원) 이하의 중소은행이 담당하고 있다. 이들 은행이 돈줄을 죄기 시작하면 미 경제·산업 경기 전반이 가라앉을 위험이 크다. 이런 이유로 골드만삭스는 올해 미국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1.5%에서 1.2%로 0.3%포인트 하향 조정했다.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강대석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증시 전반에 하락 압력이 퍼지고 있는 건 현재 시장의 우려가 단순히 미국 소형은행에 국한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며 “가파른 금리 인상의 후유증이 이제야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크레디트스위스는 16일 스위스 중앙은행이 500억 스위스프랑(약 70조원)에 이르는 긴급 자금 수혈에 나서면서 한고비 넘겼지만 위기감은 여전하다. 임재균 KB증권 연구원은 “SVB 파산에 이은 CS발(發) 변동성 위기는 세계 은행 시스템에 대한 우려, 금리 인상에 따른 은행 시스템의 취약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시장의 변동성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지만 세계 경제 향방의 ‘키’를 쥐고 있는 미국 Fed의 정책금리 전망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앞서 발표된 미국의 2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예상치에 부합했지만, 변동성이 큰 에너지와 식료품을 제외한 근원 CPI는 근원적인 물가 상승 압박이 여전해서다.
 
다만 미국의 2월 생산자물가지수(PPI)가 시장 예상과 달리 하락세로 돌아서면서 Fed가 금리 인상 부담을 덜었다는 진단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15일 미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2월 PPI는 전월보다 0.1% 하락했다. 0.3% 상승할 것이라는 시장 예상을 벗어난 수치다.
 
미 경기가 식어간다는 신호도 감지되기 시작했다. 이날 미 상무부에 따르면 2월 소매 판매가 전월보다 0.4% 감소했다. 지난 1월(3.2%)의 깜짝 증가세에서 뒷걸음질한 결과다. 휘발유와 자동차 등을 제외한 근원 소매 판매는 전월보다 0.5% 증가했지만, 1월(2.3%)보다는 오름폭이 줄었다. 이에 모건스탠리 이코노미스트들은 앞으로 몇 달간 소매판매가 냉각될 수 있다고 예상했다. 고용시장 활황이 잦아들고, 가계가 상품에 대한 지출을 줄일 수 있다는 의미다.
 
PPI와 소매판매 결과는 미국의 인플레이션 우려를 다소 덜어주는 신호로 풀이된다. 여기에 미국 SVB와 유럽 CS 등 금융시장에 유동성 불안이 확산하면서, Fed가 지난해와 같은 ‘금리 인상 행진’을 고집하기도 힘들어진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