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벌쟁이 하면서 이런 적이 없었는데….”
서울 은평구 북한산국립공원 인근에서 양봉업을 하는 모순철(66)씨가 벌통을 열더니 한숨부터 쉬었다. 평소 같으면 벌들이 빽빽하게 붙어 있는 소비(벌판)에는 꿀벌이 듬성듬성 있었다. 지난 10일 기자와 만난 모씨는 “올해는 유난히 많은 꿀벌이 죽거나 없어졌다. 220개 벌통 중에서 절반은 꿀벌이 전부 사라져 텅텅 비었다”고 했다.
지난 14일 경기 고양시의 한 딸기 농가. 하얀 딸기꽃이 비닐하우스를 가득 메웠지만, 하우스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딸기 하우스를 채우던 꿀벌 소리가 사라졌다. 비닐하우스 안의 벌통은 텅 비어 있었다. 농장주인은 “벌통에 있는 꿀벌들은 전부 사라진 지 오래고, 대체벌인 호박벌조차 구하지 못해 일주일 넘게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이어 “벌이 없어서 수정이 제대로 안 되다 보니 기형의 불량과들이 계속 나와서 솎아내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충남에서도 25만1404통 중 절반이 넘는 13만7908통이 실종 피해를 봤다. 경기도 역시 55.7%의 피해가 나타났다. 1통에 꿀벌 2만~3만 마리 정도가 살고 있으니 약 131억 마리의 꿀벌이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꿀벌값 3배…“일단 예약금부터 걸어야”
씨를 만들기 위해 꿀벌이 꼭 필요한 종자 업체들도 꿀벌 구하기에 사활을 걸고 있다. 전남 해남에서 배추·무 씨를 생산하는 종자업체 관계자는 “작년까지는 어떻게 버텼는데 올해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경기도까지 수소문해도 일단 예약금부터 걸어 놓으라고 한다”며 “4월부터는 하루에 수십만 개씩 꽃이 피는데 꿀벌 대신 사람이 인공 교배를 해야 할 상황”이라고 했다.
기후 때문? 살충제 탓?…업계 갈등 요인 되기도
지난해 한국양봉학회 학술지에 실린 ‘꿀벌의 월동 폐사와 실종에 대한 기온 변동성의 영향’ 논문에 따르면, 연구팀은 11~12월의 이상고온 현상과 1~2월 이상고온·한파 등 급격한 기온 변화가 지난해 꿀벌의 집단 폐사에 영향을 줬다고 분석했다. 특히, 2021년 11월~12월 초에 평균기온이 12도 이상인 날이 3일 이상 이어지는 등 이상고온으로 인해 겨울벌 수명이 크게 단축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겨울벌은 여름벌과 달리 육아를 하지 않고 동면하기 때문에 수명이 150일 정도로 긴데, 고온 현상으로 육아를 시작하면 체내 호르몬 구성과 생리가 달라져 수명이 40여 일로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번 겨울도 역대 가장 큰 기온폭(1월 변동폭 19.8도)을 보이는 롤러코스터 같은 날씨가 이어졌다. 이승재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 국가농림기상센터 연구개발부장은 “11월에 이상고온 현상으로 여왕벌의 산란이 활발해지면 동면을 해야 할 꿀벌이 새끼를 육아해야 돼 수명이 크게 단축된다”며 “이렇게 체력이 약해진 상황에서 겨울철에 기온이 오르면 밖으로 먹이 활동에 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 당국과 미묘한 시각차
하지만, 양봉 농가들은 농식품부가 꿀벌 실종을 농가의 책임으로만 돌리고 있다고 반발한다. 오히려 논·밭이나 산림에서 과다하게 살충제를 뿌리면서 꿀벌의 피해가 커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인구 양봉협회 강진군지부장은 “방제제보다 꿀벌 활동 반경에 살포된 살충제가 꿀벌 집단폐사의 주요 요인”이라며 “유럽은 꿀벌 생태에 악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네오니코티노이드라는 살충제 성분을 사용 못 하게 추방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만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라지는 밀원수…정책적 대응 필요
서울대학교 응용생물화학부 이승환 교수는 “(양봉 농가에서) 인공으로 단백질원이 되는 것을 만들어서 먹이로 제공해주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적인 먹이를 먹어서 건강을 유지하던 꿀벌들이 면역 기능이 약화된 것”이라며 “밀원 식물을 정책적으로 확보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