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좋은 와인을 만드는 조건은 떼루아에 있다고 알려져 있다. 품종과 토질, 태양의 삼박자가 만들어내는 신의 영역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사람의 감각, 새로운 재배 방식과 양조 기술을 더하는 와인 메이커의 역량이 커지는 추세다. ‘와인 컨슈머리포트 시즌4’ 역시 와인 메이커에 주목했다. 시즌4에서 주목한 와인 메이커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로베르토 치프레소다.
로베르토 치프레소는 교황 바오로 2세의 즉위 25주년 기념 와인과 이탈리아 통일 150주년 기념 와인을 만든 와인 메이커다. 그는 ‘플라잉 와인 메이커’로도 불린다. 전 세계 와인 산지를 다니며 요청받은 와이너리의 컨설팅을 해주는 컨설턴트를 가리키는 말이다. 실제로 치프레소가 컨설팅한 와인 산지만 30여 곳에 달한다. 요즘 국내에서 주목받고 있는 아르헨티나 말벡 와인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인물도 바로 치프레소다.
‘와인 컨슈머 리포트 시즌4’의 1차 평가에서는 로베르토 치프레소의 와인 21종을 평가했다. 치프레소가 직접 생산한 와인 7종과 그가 컨설팅한 와인 14종 등이다. 가격대는 현지가 최소 12유로(약 1만6000원)부터 100유로(약 13만원)까지 다양했다. 평가에는 와인 전문가 14명과 애호가 68명이 참여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평가에 나온 21종이 모두 실버 이상의 점수(그랑골드 2개, 골드 17개, 실버 2개, 브론즈 없음)를 받았다. 전문가와 애호가 모두 공통으로 그랑골드를 준 와인도 2종이었다. ‘치프레소 43 라 콰드라투라 델 체르키오(2018, 14.5%)’와 ‘산타 카타리나 Sta 만토 네그로(2020, 14.5%)’다.
2위는 전문가와 애호가 모두 95점을 준 ‘산타 카타리나 Sta 만토 네그로’다. 스페인 말로르카 지역의 토착 포도 품종으로 만들었는데 ‘검은 망토’라고 불릴 정도로 짙은 색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아르헨티나 말벡 와인은 나란히 3·4위를 차지했다. 농도 짙은 맛으로 유명한 말벡은 남프랑스 쿠아 보르도에서 재배되던 토착 품종인데, 1853년 아르헨티나에서 재배를 시작하면서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와인이 됐다.
다만 선택은 갈렸다. 애호가는 말벡 와인 중에서도 ‘보데가 도밍고 몰리나 파차마마(2016, 14.5%)’를, 전문가는 ‘마테르비니 핀카 페르드리엘(2018, 14.4%)’을 선택했다. 겨우 1점 차이로 박빙이었다. 하지만 가격 차이는 크다. 애호가가 선호한 와인보다 전문가가 꼽은 와인이 두 배는 비쌌다.
와인 컨슈머리포트를 공동 주관하고 있는 와인소풍의 이철형 대표는 “국내 와인 소비가 늘며 소비자가 전문가 못지않은 수준을 보였다”며 “특히 전문 평가단의 실력이 해외 전문가나 전문 잡지의 평과 상당히 유사한 점도 이번 품평회의 수확이다. 이제 생산량이 많지 않은 개성 강한 와인을 국내 소비자들에게 소개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