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선생에게 졸업을 앞둔 소회를 먼저 물었더니 “내가 최고령 박사라고들 주변에서 말하지만, 특별히 내 나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 나이에도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걸 남들이 인정해주고, 도와주고, 격려해준 데 대해 감사할 뿐”이라고 답이 돌아왔다. 87세에 대학원 정규과정을 시작한 그는 “나이가 많은데 어떻게 공부를 할 수 있겠냐고 걱정한 사람이 더러 있었다”면서도 “하지만 난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편”이라며 미소지었다.
쥬빌리통일구국기도회 상임위원장 임기를 마치고 후임자에 업무인계를 하는 중 이 선생은 가족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다 끝나면 사회학 공부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중소기업 경영자 모임에서 종종 강연자로 초빙했던 사회학 교수들이 궁금한 점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내놓는 모습을 흠모해 왔던 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회학 박사과정은 꿈도 꾸지 않았지만, 며칠 뒤 딸이 밥을 같이 먹자며 데려간 곳이 성공회대였다.
평소 유튜브로 고(故) 신영복 선생의 강연을 즐겨 보던 딸이 사회학 공부를 하고 싶다는 어머니를 신영복 선생이 교수로 몸담던 학교로 안내했다고 한다. 그날은 마침 대학원 원서접수 마감일이었다. ‘원서 마감이 1시간 남았다’는 대학 관계자의 말에 두 모녀는 옆 건물 컴퓨터실로 들어가 함께 원서를 작성하고 접수했다. 닷새 뒤 구술면접을 대비해 사회학개론 등 사회학 입문 서적 세 권을 사서 외다시피 했다. 면접 때 전공 관련 질문은 없었지만 “저는 일을 맡으면 꽤 열심히 하는 사람입니다”라는 만학도의 당찬 답변에 교수들은 합격점을 줬다.
서울 광진구에서 구로구까지 동서를 가로지르는 등하굣길만 빼면 대학원 생활 적응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첫 학기 ‘소수자 연구’라는 수업에서 “내가 유일한 소수자니까 잘 봐달라”고 농담 섞인 자기소개를 했더니 오히려 젊은 동급생들이 “상숙쌤”이라고 부르며 먼저 다가와줬다. 이 선생은 “젊은이들 모임에 매번 따라가는 건 힘들었지만, 가끔은 모여서 음식도 해먹고 기타 치고 노래도 부르면서 어울렸다”며 “내가 정신연령이 좀 낮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 선생이 사회학을 택한 이유는 국내, 남북한, 국제사회의 극단적 이념 갈등의 해법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조그마한 나라에서 둘로 나뉘어서 서로 원수인양 싸우는 건 백해무익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고 했다. 이를 위해 자신의 신앙이자 대외활동의 원천이었던 기독교를 사회학적으로 탐구하고자 했다. 이 선생은 “인간 예수를 소개하면서 그가 어떻게 하나님께 헌신하고 순종했느냐, 그게 사회학적으로는 어떤 의미를 갖느냐를 연구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유토피아적 전체주의에 사로잡힌 이는 유토피아적 전체주의에 의해 벌어지는 폭력을 보지 못한다. 전체주의적 악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은 ‘나는 나다’라는, 자기정체성의 감옥을 깨고 나오는 것”이라며 “십자가에 못박히면서도 자신을 손가락질 하는 이들의 용서를 빌었던 예수의 ‘혁명적 순종’이 바로 그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박사논문 「인간 예수의 ‘혁명적 순종’이 갖는 정치 윤리와 레비나스의 케노시스론」에 이러한 자신의 주장과 논거를 자세히 담았다.
이 선생에게 졸업 후 계획을 물었더니 “나는 사회학 공부를 포함해 내가 뭔가를 하고자 결심하고 한 적이 없다”며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할 일을 주실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당장 오는 25일에 학회에서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는 그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함께 연구해보고 싶었던 내용을 분량이 너무 많아 떼어놓았다” 며 “당분간은 이 내용을 바탕으로 책을 쓰면서 지낼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