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양정무의 그림세상

[양정무의 그림세상] 뒤러의 토끼, 백남준의 토끼

중앙일보

입력 2023.01.19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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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계묘년 토끼해를 맞아 토끼의 좋은 기운을 담은 명작 두 점을 만나보자. 먼저 독일의 국민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토끼 그림이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쫑긋 세운 큰 귀, 여기에 보슬보슬한 털까지 너무나 생생해서 500년 전 작품이지만 지금 언제라도 우리 눈앞에서 튀어 오를 기세다. 특히 오른쪽 귀를 보면 살짝 비틀려 있어 주변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윤기 나는 털도 인상적인데, 한 올 한 올 정교하게 그렸을 뿐만 아니라 결이 바뀌는 모양까지 낚아챘다. 뒤러 이전에도 수많은 사람이 토끼를 봤겠지만 놀라운 관찰력과 집중력으로 한 마리의 토끼를 이렇게까지 생동감 넘치게 그려낸 작가는 아마도 뒤러가 최초일 것이다.
 
토끼의 앙증맞은 앞발 아래를 보면 작가의 이름 앞글자(A, D)를 딴 모노그램과 제작연도가 적혀 있다. 특히 제작연도 1502년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와 이 작품이 동시대라는 것을 일러준다. 뒤러의 토끼는 르네상스 시기 화가들의 지적 호기심이 인간을 포함하여 세상 만물에 뻗치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뒤러의 토끼는 오스트리아 빈 알베르티나 박물관에 있다. 주로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어 진작은 실견하기 어렵지만, 클림트의 ‘키스’와 함께 빈을 대표하는 명작으로 사랑받고 있다.
 
500년 전 뒤러의 걸작
금방이라도 튀어오를듯
백남준의 TV 보는 토끼
명상하는 수도승 닮아
 

백남준, 달에 사는 토끼, TV 모니터와 토끼 조각상, 1996년. 토끼가 텔레비전 수상기 속의 달을 명상하는 듯하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뒤러의 토끼가 주는 늠름함이 새해의 힘찬 출발을 북돋워 준다면 이제부터 살펴볼 작품은 한 해의 시작을 명상적으로 맞이하게 해준다. 백남준은 1996년에 텔레비전 수상기 앞에 토끼를 배치한 미디어 설치 작품을 선보인다. 여기서 토끼는 마치 수도승처럼 텔레비전 모니터에 잡힌 보름달을 묵묵히 감상하고 있다. 우리는 예부터 달의 그림자를 보고 방아 찧는 토끼를 상상했는데, 백남준의 토끼도 우리와 같은 마음으로 달을 바라볼지 궁금하다.
 
앞서 백남준은 텔레비전 12대를 이용해 달이 초승달에서 보름달까지 차오르는 과정을 연출한 바 있다. 그리고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라고 이름 붙였다. 작품 제목처럼 우리의 먼 조상들은 우리가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을 보듯이 달을 열심히 바라봤을까. 우리처럼 달 속에서 토끼의 이미지를 찾아냈을까.


알브레히트 뒤러의 토끼 세밀화.

아마 인류가 달의 얼룩을 보고 토끼뿐만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상상해 냈다면 그것은 인류가 드디어 미술의 탄생을 의미할 수 있는 인지혁명의 순간일 것이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얼룩 같은 달의 그림자에서 새로운 개념을 연결짓는 능력은 오직 인간만이 가진 높은 단계의 인지능력이기 때문이다.
 
칠흑 같은 밤하늘에 둥실 떠오른 보름달은 태곳적부터 인류에게 상상력의 근원으로 작용했다. 흥미롭게도 동아시아에서 달의 그림자는 오래전부터 토끼와 연결되었다는 것은 토끼가 일찍부터 우리에게 상상의 근원이 되는 신비로운 영물이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토끼-오리 이미지.

여기에 철학자 비트겐슈타인부터 미술사학자 곰브리치가 토끼-오리 형상이 중첩된 이중 이미지를 이용하여 ‘본다는 것’의 원리를 근원적으로 탐구해 나갔다는 것까지 고려한다면, 토끼야말로 단순히 동물을 떠나 인류의 사유체계를 일깨워주는 중요한 매개체였다고 말할 수 있다. 백남준의 ‘달에 사는 토끼’도 이 같은 철학적 맥락 아래에서 오래전부터 인류의 상상력을 자극해 온 토끼의 의미를 재치 있게 드러낸다.
 
뒤러의 토끼는 지구 반대편에 있지만 백남준의 토끼는 지금 당장 만나 볼 수 있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백남준의 미술을 한국 동시대 미술의 맥락에서 바라보는 대규모 전시(2월 26일까지)가 열리고 있다. ‘달에 사는 토끼’뿐만 아니라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 같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시간을 잘 맞춰 가면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념해 백남준 작가가 야심 차게 만든 초대형 비디오 설치 작품 ‘다다익선’도 제대로 볼 수 있다. 구형 모니터 1003대가 하나둘씩 고장 나면서 2018년 완전히 멈춰 섰는데 대대적인 수리를 거쳐 지난해 9월부터 하루 두 시간씩 제한적으로 재가동하고 있다. 오후 2시부터 주 4일만 운용한다고 하니 미리 작동시간을 확인하는 게 좋다.
 
2023년 토끼해를 맞아 토끼를 주제로 한 전시가 여기저기서 진행되고 있다. 나의 경우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새해, 토끼 왔네’(3월 6일까지)를 추천하고 싶다. 토끼와 관계된 미술작품 70여 점이 나왔고, 달과 토끼를 주제로 한 특별 섹션도 마련됐다. 백남준의 토끼를 연상하면서 본다면 감상의 즐거움이 두 배로 커질 것이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