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전’ 허균 집안의 비극
가족은 날개인가, 굴레인가
조선시대는 개인의 흥망성쇠가 가족과 연동되고 부모와 조상을 통해 내 존재가 설명되는, 모든 길은 가족으로 통하는 사회였다. 물론 그 내부는 적서(嫡庶) 차별로 인해 가족이 날개인 사람과 가족이 굴레인 사람으로 나뉜다. 허균은 양반의 적자이지만 서자의 설움을 알았고, 신분의 족쇄에 걸린 유능한 인재를 안타깝게 여겼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이록(利祿)을 취하고 명망을 훔치는’ 선현들을 붓끝으로 조롱하면서 특권의식에 도취된 양반을 비웃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적 특권을 누리기보다 넘어서고자 했던 그를 사람들은 ‘하늘이 내린 괴물(天生一怪物)’이라 했다.
양반 적자임에도 특권층 비웃어
역모 혐의로 숨진 시대의 반항아
누이 난설헌 등 ‘허씨 5문장’ 명성
유·불·선 넘나드는 자유로운 가풍
붕당정치·임란에 일가 모두 희생
음모·조작의 연속극, 지금 우리는?
역모 혐의로 숨진 시대의 반항아
누이 난설헌 등 ‘허씨 5문장’ 명성
유·불·선 넘나드는 자유로운 가풍
붕당정치·임란에 일가 모두 희생
음모·조작의 연속극, 지금 우리는?
어린 기억 속의 그는 세상의 버릇없는 막내들과 다를 바 없는 부모와 형제자매의 사랑을 독차지한 응석받이였다. 아버지 허엽(1517~1580)이 53세에 낳은 늦둥이에 형들과의 나이 차는 무려 스무살이 넘었다. “열두 살 때 엄친을 여의었는데, 어머니나 형님들은 나를 어여삐 여기고 사랑만 하여 공부를 재촉하지 않았어요. 좀 더 자라서 과거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그들을 따라 육경(六經)과 역사서를 두루 읽기 시작했지요.”(‘답이생서, 答李生書’)
유성룡·이순신 집안과 교류
아버지 허엽의 폭넓은 세계
“형님들이나 누님의 글은 가정에서 나왔다”고 한 허균의 말을 보면 가족이 곧 교학(敎學)의 공간이었다. 유교는 물론 불교·도교와도 왕래한 허엽의 폭넓은 지식 세계는 아들과 딸에게 그대로 계승된다. 난설헌이 선계(仙界)에서 노니는 자유 정신을 그린 것이나 허봉과 허균이 불교에 빠졌다는 비판을 받은 것에서 그 내력을 짐작할 수 있다. 허균은 “중형(仲兄)이 적소(謫所)로부터 돌아와서 비로소 고문(古文)을 가르쳐 주셨고” “젊었을 때 중형의 명으로 손곡 옹에게 시를 물어 방향을 잡게 되었다”고 한다.
즐거움도 고통도 공유한 형제들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성장한 허씨 가족은 서로가 겪는 수난과 고통도 자기 일인 양 아파했다. 허봉은 네댓 살 먹은 누이의 아들이 죽자 극진한 슬픔을 기록으로 남겼다.
‘피어보지도 못하고 꺾인 아이는 희윤이다. 희윤의 아버지는 성립인데, 나의 매부다. 희윤의 할아버지는 첨(瞻)인데, 내 친구다. 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짓는다. 해맑은 얼굴에 반짝이던 눈, 만고의 슬픔을 이 한 곡(哭)에 부치노라.’(‘희윤묘지, 喜胤墓誌’)
허씨 가족은 동서 분당의 정치적 갈등과 임진왜란의 직격탄을 맞으며 쇠락해간다. 동인에 속한 허봉은 이이(李珥)를 탄핵했다가 살아 돌아오는 자가 드물다는 갑산 유배에 처해졌다. 여동생 난설헌은 그 안타까움을 시에 담아 “멀리 갑산으로 귀양 가는 나그네”를 위로하고, “변방의 소식 뜸하니 이 시름 풀 길이 없는” 극한의 슬픔에 빠진다. 허봉은 2년여 유배에서 풀려나지만 38세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고, 이듬해에는 난설헌이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죽이고, 또 죽이는 역사의 질곡
그들은 가족애를 바탕으로 각자의 세계를 구축하지만 역적이 된 허균으로 인해 아버지는 무덤이 훼손되고 형과 누이는 역사의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조작과 음모로 죄가 만들어지고 상하좌우 모든 가족을 죽이고 다시 죽이는, 이런 형태는 물리고 싶은 역사이다.
공초(供招) 기록을 보면, 허균 사건은 영의정 기자헌이 폐모 문제로 위기에 몰리자 그 아들 기준격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허균이 임금을 해칠 모의를 한다”는 고변에서 시작된다. 허균에게 글을 배울 때 역모의 조짐을 보았다는 것이다. 치열한 공방 끝에 허균 가족은 결국 역적의 씨를 배태한 “본래 패려궂은 집안”으로 단죄된다. 그런데 승리한 기씨 부자가 “본디 흉악하고 음흉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형장의 이슬이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이숙인=성균관대 동양철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중국 고대 유교경전 연구로 박사학위를 했다. 근래에는 여성과 가족으로 조선시대의 역사와 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또 하나의 조선』 『정절의 역사』 『동아시아고대의 여성사상』 등을 냈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