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거짓에 돈·권력 주는 SNS, 민주주의 위기 낳았다”

중앙일보

입력 2022.12.19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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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마리아 레사는 최근 발간한 회고록에서 민주주의 위기를 불러온 SNS 정보 생태계를 고발한다. [AP=연합뉴스]

“한때 우리가 살았던 세상은 사라졌다. 이제 우리는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지 결정해야 한다.”
 
지난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필리핀 언론인 마리아 레사(59)가 이달 초 출간한 회고록 『권력은 현실을 어떻게 조작하는가』(북하우스)를 통해 던진 경고다. 그는 저널리즘의 황금기인 1980년대부터 소셜미디어(SNS)가 언론을 대체한 최근까지 언론 현장을 경험했다. 2012년 탐사 매체 ‘래플러(Rappler)’를 설립했다. 두테르테 정권의 마약과의 전쟁, SNS를 활용한 정치선전 작전 등을 파고들어 심층 보도하다가 정권의 탄압에 시달렸다. 그에게 적용된 혐의만 10여 가지, 누적 구형량은 100년이 넘는다.
 
노벨상 수상 1년여 만에 레사가 내놓은 이 책은 개인 투쟁기인 동시에, SNS가 장악한 정보 생태계가 어떻게 민주주의 위기로 이어졌는지 고발하는 탄원서다. 회고록 출간을 맞아 본지와 화상 인터뷰한 그는 “내가 언론인이 된 1986년 필리핀에서 ‘피플파워 혁명’(마르코스 독재정권을 몰아낸 민주화 혁명)이 있었고, 비슷한 시기 한국·미얀마·인도네시아 등에서도 민주화 물결이 일었다. 그러나 오늘날 전 세계 민주주의는 그 이전 수준으로 후퇴하고 있다”며 “지금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창조적 파괴’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마리아 레사가 출간한 회고록 『권력은 현실을 어떻게 조작하는가』.

간략한 책 소개 부탁한다. 이 책이 한국 독자에게 어떤 의미일까.
“2016년 래플러와 나에 대한 필리핀 정부의 공격이 시작되면서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즈음부터 기존의 정보 생태계가 완전히 뒤집히고, 사실에 대한 기준과 윤리, 규율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책은 기술이 어떻게 정보 생태계를 변화시키며, 권력이 기술을 어떻게 활용해 언론을 공격하고 더 큰 힘을 얻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내냐’고 묻지만, 사실 나는 용기를 낸 게 아니라 기자로서 하던 일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진실 추구라는 직업윤리를 따랐다는 것만으로 여생을 감옥에서 보낼 준비를 해야 했다. SNS는 점점 더 권력에 민감한 질문을 던지는 언론인을 향한 무기로 활용되고 있다.”
 
페이스북 등 SNS들은 가짜뉴스를 필터링하는 각종 조처를 한다고 주장하는데.
“턱없이 부족하다. 조치의 영향은 체감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조치가 너무 늦었다. 이들이 ‘좌표 찍기(brigading)’에 대한 대책을 지난해 도입한 것도 내가 이 문제를 처음 알린 지 5~6년이 지나서다. 여론을 왜곡하는 SNS 계정 중에는 가짜도 있지만, 돈을 받고 동원된 사람들이 만든 진짜 계정도 많다.”
 
가짜뉴스를 어떤 기준으로 통제할지 정하는 건 간단치 않다. ‘표현의 자유 침해’ 우려도 나오는데.
“SNS상 허위 정보는 결코 표현의 자유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그런 주장이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억누른다. 문제의 핵심은 SNS 기업들이 ‘사실’보다 ‘거짓’이 압도적으로 빨리 퍼지도록 알고리즘을 디자인했다는 거다. 언론이 아무리 좋은 심층 기사를 써도, 분노와 혐오를 담은 가짜뉴스보다 주목받지 못한다. SNS 플랫폼은 ‘거짓말 한 번 할 때마다 보상해 줄게’라며 아이를 꼬드기는 어른처럼, 인간성의 가장 악한 부분을 부추긴다.”
 
한국은 포털 사이트가 언론의 게이트 키핑 기능의 상당 부분을 대체했다.
“SNS든 포털이든 공론장에 대한 게이트 키퍼 역할을 하는 플랫폼이라면 투명성을 갖춰야 한다. 모든 테크 기업은 기사 생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유통 역할만 가져간 뒤, 질 나쁜 기사가 더 빨리, 더 멀리 퍼지게 했다. 그게 자신들 수익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공론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면 편집 기준을 투명하게 공개해 책임을 다해야 한다. ‘사기업의 비밀’ 같은 변명은 안 된다.”
 
레사는 정보 생태계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을 책에서 제시한다. 예컨대 여러 언론사가 협력해 사실 확인 단계를 거치면, 시민단체·비정부기구(NGO) 등이 이를 확산하고, 연구기관은 허위 정보 유통을 감시하는 식의 범사회적 협동 구조를 조직하자는 거다. 그는 “장기적으로는 교육과 입법이 해결책이지만, 그 전까지는 ‘사실 확인’이라는 본질을 보호할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레사는 아직 정부의 탄압을 받는다. 그래도 “인간 본성의 선함을 믿는다”고 수차례 책에 적었다. 그는 “기자로서 수많은 재난 현장을 취재하면서 위기일수록 사람들은 서로 돕고 친절을 베푼다는 것을 느꼈다”며 “SNS는 인류의 악한 부분을 강화하는 ‘독성 진창’이지만, 인류애에 대한 근본적 믿음은 절대 잊어선 안 된다”고 했다. 
 
☞마리아 레사=202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1963년 필리핀에서 태어났고, 10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를 졸업했다. 귀국 후 필리핀 국영 방송사 PTV4의 프로듀서로 시작해 CNN 마닐라·자카르타 지국, 필리핀 최대 뉴스그룹인 ABS-CBN을 이끌었다. 현재 2012년 창립한 독립 탐사 매체 ‘래플러’의 CEO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