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영 신화사는 장쩌민 전 주석이 백혈병과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숨졌다고 발표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위원장으로 하는 688명 장례위원회는 중국의 국장(國葬)인 추도대회 거행 전 천안문·신화문·인민대회당과 각 외교 공관에 조기를 게양한다고 밝혔다. 또 중국의 관례에 따라 외국 정부와 정당 대표를 국장에 초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장 전 주석은 중공 3세대 지도부의 핵심 지도자였다.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의 무력 진압을 반대한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를 낙마시킨 덩샤오핑(鄧小平)이 천윈(陳雲)과 합의해 상하이 서기였던 장쩌민을 당 총서기로 임명하면서 최고 권좌에 올랐다. 1997년 덩샤오핑 사후 2002년 당권, 2004년 군권을 후진타오에게 넘길 때까지 중국 최고 실권자로 군림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피를 흘리지 않고 권력을 이양하면서 5년 임기 연임을 공식화한 첫 번째 지도자다.
1990년대 위안화 환율을 고수하고 기반시설에 대규모 투자를 감행해 아시아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후계자인 후진타오 시대 경제 급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대외 관계에서는 미국 등 주요국과 관계 개선에 노력했다. 한·중 수교도 그의 총서기 재임 기간에 이뤄졌다. 1995년 11월 한국을 국빈 방문했다. 서양 및 홍콩 언론인과 인터뷰도 즐겼다. 2000년 8월 15일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미국 CBS 기자 마이크 월리스와의 인터뷰로 유명하다. 2000년 10월 베이징 중난하이 집무실에서 홍콩 기자의 질문에 불끈하며 영어로 “너무 어리고(too young), 지나치게 단순하고(too simple), 때로 유치하다(sometimes naive)”고 비판했던 영상은 지금도 널리 회자한다.
공과 함께 과(過)도 적지 않다. 장 전 주석은 티베트와 기공 수련 단체인 파룬궁 탄압을 막후에서 지휘했다. 경제적으로는 양적 성장에 집착해 구조 조정을 지연하면서 경제 불균형 및 시장 왜곡을 심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명문 양저우 중학을 나온 장쩌민은 실용적인 학문을 찾아 난징 중앙대학에서 전기기계를 배우다 상하이교통대학으로 옮겨 졸업했다. 1946년 공산당에 입학한 장쩌민은 1950년대 모스크바로 파견돼 스탈린 자동차 공장에서 전력공급장치를 익히고 돌아왔다. 상당한 수준의 영어와 러시아어는 이때 익혔다.
2011년 7월 6일 홍콩 아시아TV뉴스가 사망 오보를 낸 적이 있는 장 전 주석은 2019년 7월 리펑(李鵬) 전 총리 영결식, 10월 건국 70주년 천안문 열병식을 끝으로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상하이를 기반으로 둔 정치세력인 상하이방의 대부였다. 지난 2012년 최고지도자가 차차기 지도자를 지정하는 격세지정 관례에 따라 후진타오가 지지한 리커창(李克强)에 맞서 시진핑을 지지했다. 이후 시진핑이 1인권력을 강화하며 갈등설이 불거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