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들 겨울이 춥지 않겠느냐마는, 인생의 혹한기라 할 수 있는 취업준비기를 지나는 청춘들에게 겨울은 유독 더 시린 계절이다. 이 시대 청년들이 연애·결혼·출산 등등을 포기한 ‘N포 세대’라는 이야기도 더는 새롭지 않지만, 때론 팩트를 나열한 문장보다 현실을 재구성한 픽션을 통해 냉엄한 현실이 더 선연히 와 닿기도 한다.
30일 개봉한 영화 ‘그 겨울, 나는’(감독 오성호)은 바로 이런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영화는 공시생 경학(권다함)과 취준생 혜진(권소현), 29살 동갑내기 커플이 어느 추운 겨울을 통과하며 겪는 굴곡을 섬세하게 쫓아가는 청춘멜로극이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어디선가 들어본 사연인 듯싶지만, 차가운 현실 속에 변해가는 두 청춘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나면 상투적으로 들리던 청년들의 고통이 더없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런 성취를 인정받아 영화는 지난해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배우 권다함에게 주어진 ‘올해의 배우상’을 포함해 3개 부문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부국제 ‘올해의 배우상’ 권다함이 그린 흔들리는 청춘
권다함이 연기한 경학은 성실한 공시생이자 살가운 남자친구였으나, 갑작스레 어머니의 빚을 떠안은 뒤 배달 알바 등 생활 전선에 뛰어들며 점차 가시 돋친 모습으로 변하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서울예대를 졸업한 뒤 주로 단편 독립영화로 필모그래피를 쌓은 권다함은 첫 장편 주연작으로 ‘그 겨울, 나는’을 택한 이유를 “좀 더 뜨거운 영화를 해보고 싶었다”는 말로 설명했다. “장편 독립영화는 캐릭터들이 대부분 잔잔하고 감정 표출이 많지 않은데, 이 영화는 독립영화지만 좀 더 직관적이고 적극적인 표현이 가능할 것 같았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휩쓸리기보다 혼자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걸 좋아한다”는 그는 경학을 표현할 때도 시나리오상의 둥글고 순수한 인상이 아닌, “저항하는 에너지”로 가득한 이미지를 먼저 세우고 들어갔다. 자칫 비호감 캐릭터로 비칠까 봐 감독도, 배우도 불안했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쁜 모습만 갖고 있는 게 아니니 ‘못난’ 인물로 표현하는 게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밀고 나갔다. 권다함의 말대로 경학은 모나고 뒤틀린 구석이 많지만 그래서 더 실재 인물처럼 다가온다. “어머니가 영화를 보시고 나오면서 제가 마치 경학인 것처럼 ‘그러게 여자친구한테 좀 잘하지 그랬니’라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살아남자’며 촬영…모든 장면 깊이 공감”
영화는 두 주연 배우의 첫 장편 주연작일 뿐 아니라, 오성호 감독에게도 첫 장편 연출작이다. 그런 만큼 2년 전 이맘때쯤 진행된 촬영은 영화 속 경학·혜진의 겨울 만큼이나 하루하루 위태로운 나날이었다. “독립영화 환경은 정말 열악해요. 예산이 부족하면 촬영 회차를 줄이고 신을 삭제할 수밖에 없어서 ‘우리가 구상했던 영화를 절대 못 만들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컸어요. 그래서 촬영 일정대로 찍은 날에는 ‘우리 오늘 살아남았다’라고 안도하고 ‘내일도 살아남자’라고 서로 다독였어요.”
그렇게 치열하게 완성한 결과물로 받은 부산국제영화제 배우상은 그간의 설움을 한 번에 씻겨준, “배우이기 이전에 인간적으로 너무 다행스러운 상”이었다. “사실 그 전까지 인지를 못 했었는데, 독립영화를 하면서 좋은 기억도 많았지만, 불안정하고 무력한 시간도 많았더라고요. 그런데 상을 받고 나니 누가 제 몸속에 들어와서 곳곳에 쌓여있던 어두운 기억들을 싹 청소해주고 나간 느낌이었어요.”
“보편적인 ‘인생의 겨울’ 이야기”
어쩌면 스스로 인생의 혹한기가 낳은 ‘그 겨울, 나는’에 대해 권다함은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인생의 겨울’에 관한 이야기”라고 소개하며 “분명 영화에서 각자의 겨울과 비슷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끔 누군가의 아픔을 같이 지켜보고 공감하는 것만으로 큰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절대 고통스럽기만 한 영화는 아니고 굉장히 뜨겁고 재밌는 영화이니 두려워 마시고 가볍게 극장에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