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찍었죠"…가난한 청춘 그린 독립영화 '그 겨울, 나는'

중앙일보

입력 2022.11.30 16:16

수정 2022.11.30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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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개봉한 영화 '그 겨울, 나는'은 생계 문제에 맞닥뜨리며 관계에 균열을 맞는 29살 동갑내기 커플 경학(권다함)과 혜진(권소현)의 이야기를 섬세한 시선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사진 더쿱디스트리뷰션

 
누군들 겨울이 춥지 않겠느냐마는, 인생의 혹한기라 할 수 있는 취업준비기를 지나는 청춘들에게 겨울은 유독 더 시린 계절이다. 이 시대 청년들이 연애·결혼·출산 등등을 포기한 ‘N포 세대’라는 이야기도 더는 새롭지 않지만, 때론 팩트를 나열한 문장보다 현실을 재구성한 픽션을 통해 냉엄한 현실이 더 선연히 와 닿기도 한다.  
 
30일 개봉한 영화 ‘그 겨울, 나는’(감독 오성호)은 바로 이런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영화는 공시생 경학(권다함)과 취준생 혜진(권소현), 29살 동갑내기 커플이 어느 추운 겨울을 통과하며 겪는 굴곡을 섬세하게 쫓아가는 청춘멜로극이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어디선가 들어본 사연인 듯싶지만, 차가운 현실 속에 변해가는 두 청춘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나면 상투적으로 들리던 청년들의 고통이 더없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런 성취를 인정받아 영화는 지난해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배우 권다함에게 주어진 ‘올해의 배우상’을 포함해 3개 부문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부국제 ‘올해의 배우상’ 권다함이 그린 흔들리는 청춘

29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권다함(33)은 “처음에는 개봉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는데, 막상 개봉이 코앞에 다가오니 독립영화라 상영관이 많지 않아 조바심이 들고 불안하더라”고 소감을 털어놨다.
 

배우 권다함이 연기한 영화 '그 겨울, 나는' 속 경학은 착실한 경찰 공무원 준비생이었으나 어머니의 빚을 떠안고 생활 전선에 뛰어든 후로 점차 울분이 쌓여가는 인물이다. 사진 더쿱디스트리뷰션

 
권다함이 연기한 경학은 성실한 공시생이자 살가운 남자친구였으나, 갑작스레 어머니의 빚을 떠안은 뒤 배달 알바 등 생활 전선에 뛰어들며 점차 가시 돋친 모습으로 변하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서울예대를 졸업한 뒤 주로 단편 독립영화로 필모그래피를 쌓은 권다함은 첫 장편 주연작으로 ‘그 겨울, 나는’을 택한 이유를 “좀 더 뜨거운 영화를 해보고 싶었다”는 말로 설명했다. “장편 독립영화는 캐릭터들이 대부분 잔잔하고 감정 표출이 많지 않은데, 이 영화는 독립영화지만 좀 더 직관적이고 적극적인 표현이 가능할 것 같았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휩쓸리기보다 혼자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걸 좋아한다”는 그는 경학을 표현할 때도 시나리오상의 둥글고 순수한 인상이 아닌, “저항하는 에너지”로 가득한 이미지를 먼저 세우고 들어갔다. 자칫 비호감 캐릭터로 비칠까 봐 감독도, 배우도 불안했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쁜 모습만 갖고 있는 게 아니니 ‘못난’ 인물로 표현하는 게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밀고 나갔다. 권다함의 말대로 경학은 모나고 뒤틀린 구석이 많지만 그래서 더 실재 인물처럼 다가온다. “어머니가 영화를 보시고 나오면서 제가 마치 경학인 것처럼 ‘그러게 여자친구한테 좀 잘하지 그랬니’라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영화 '그 겨울, 나는' 속 경학(권다함)과 혜진(권소현)은 부족한 형편에도 서로 의지하며 생활하던 연인이었지만, 경학이 갑작스레 어머니의 빚 2000만원을 떠안고, 혜진은 취직을 한 뒤로 점차 어긋난다. 사진 더쿱디스트리뷰션

'그 겨울, 나는'은 배우 권다함·권소현의 첫 장편 주연작일 뿐 아니라 오성호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기도 했다. 권다함은 "예산이 부족한 독립영화다 보니 회차가 줄어 장면들이 삭제될까 걱정됐다"며 "매일 '살아남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찍었다"고 돌이켰다. 사진 더쿱디스트리뷰션

 

“‘살아남자’며 촬영…모든 장면 깊이 공감”

결국 생계를 위해 공장 일까지 하게 되고 그곳에서 끝내 무너지는 순간을 맞이하는 경학의 모습이 표현하기 쉽지 않았을 법하지만, 권다함은 의외로 “마지막 공장 장면이 제일 수월하게 공감됐다”고 했다. “아마 배우의 90% 정도가 생활고에 시달릴 거예요. 저도 지게차 운전, 창고 알바까지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여서 경학의 상황이 빠짐없이 다 이해가 갔어요. 특히 대리운전할 때는 1000~2000원이 아까워서 목이 너무 마른데도 참은 기억이 있는데, 그런 상황에 처하면 사람이 더 약해지잖아요.”
 
영화는 두 주연 배우의 첫 장편 주연작일 뿐 아니라, 오성호 감독에게도 첫 장편 연출작이다. 그런 만큼 2년 전 이맘때쯤 진행된 촬영은 영화 속 경학·혜진의 겨울 만큼이나 하루하루 위태로운 나날이었다. “독립영화 환경은 정말 열악해요. 예산이 부족하면 촬영 회차를 줄이고 신을 삭제할 수밖에 없어서 ‘우리가 구상했던 영화를 절대 못 만들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컸어요. 그래서 촬영 일정대로 찍은 날에는 ‘우리 오늘 살아남았다’라고 안도하고 ‘내일도 살아남자’라고 서로 다독였어요.”
 

권다함은 '그 겨울, 나는'으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한 뒤로 "누군가 머릿속에 들어와 그간의 불안, 우울, 무기력을 청소를 해준 기분이었다"고 했다. 당시 심사를 했던 배우 엄정화, 조진웅은 그의 연기에 대해 "진심 어린 이입점을 만들어 철저히 인물의 심리 속에 가두는 듯한 강렬함을 선사한다"고 평했다. 사진 더쿱디스트리뷰션

 
그렇게 치열하게 완성한 결과물로 받은 부산국제영화제 배우상은 그간의 설움을 한 번에 씻겨준, “배우이기 이전에 인간적으로 너무 다행스러운 상”이었다. “사실 그 전까지 인지를 못 했었는데, 독립영화를 하면서 좋은 기억도 많았지만, 불안정하고 무력한 시간도 많았더라고요. 그런데 상을 받고 나니 누가 제 몸속에 들어와서 곳곳에 쌓여있던 어두운 기억들을 싹 청소해주고 나간 느낌이었어요.” 
 

“보편적인 ‘인생의 겨울’ 이야기”

줄곧 독립영화계에만 머물렀던 권다함은 이번 수상을 기점으로 상업 영화에 도전하고 싶다는 새 목표도 생겼다. “그동안 상업영화에 대해 편견 혹은 피해의식 같은 게 있었는데, 상업 현장에도 너무 좋은 감독님과 선배님들이 계시더라고요. 일단 지금 찍고 있는 상업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행복하게 찍고 그 후에 다른 작품들도 계속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어쩌면 스스로 인생의 혹한기가 낳은 ‘그 겨울, 나는’에 대해 권다함은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인생의 겨울’에 관한 이야기”라고 소개하며 “분명 영화에서 각자의 겨울과 비슷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끔 누군가의 아픔을 같이 지켜보고 공감하는 것만으로 큰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절대 고통스럽기만 한 영화는 아니고 굉장히 뜨겁고 재밌는 영화이니 두려워 마시고 가볍게 극장에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