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마음 읽기

[마음 읽기] 낙엽을 쓸며

중앙일보

입력 2022.11.30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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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시인

어느덧 십일월의 마지막 날이고 올해는 마지막 달을 남겨놓고 있다. 물들었던 나무 잎사귀들은 지고 낙엽으로 뒹군다. 박인환 시인이 시 ‘세월이 가면’에서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라고 노래한 대목이 저절로 떠오른다.
 
요즘은 낙엽을 비로 쓰는 일이 잦다. 팽나무 잎사귀며 꾸지뽕나무 잎사귀, 멀구슬나무 잎사귀, 감나무 잎사귀들을 쓸어 모아 귤나무 아래에 놓아둔다. 여러 수종의 잎사귀들은 더 마르고 썩어 귤나무를 키울 것이다. 낙엽을 쓸다 보면 잎사귀마다 특유의 모양과 크기가 있다는 것을 다시금 새롭게 알게 되고, 더러는 낙엽의 냄새도 맡게 된다. 동시에 그 낙엽에는 봄과 여름과 가을의 시간이 함께 담겨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봄의 신록과 꽃, 여름의 나무 그늘, 가을의 단풍과 열매가 이 바스락거리는 낙엽 속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낙엽에는 우리들이 보낸 한 해의 시간도 남겨져 있다.
 
낙엽에는 우리의 시간 담겨 있어
지나간 일과 내면을 돌아보게 돼
마음속 잔잔한 평온도 살폈으면
 
미국에서 태어난 시인 메리 올리버는 ‘나는 큰떡갈나무 아래 살았을 때/ 나뭇잎으로 만들어진 느낌이었지./ 나는 리틀시스터 연못가에 살았을 때,/ 기슭에 남겨진/ 왜가리 깃털이 된 꿈을 꾸었지./ 나는 수련이었고, 내 뿌리는 동맥처럼 섬세했어./ 얼굴은 별 같았고,/ 행복이 넘쳐흘렀지.’라고 멋지게 표현했는데, 나는 메리 올리버가 이렇게 쓴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큰 자연 속에 살면서 우리는 작은 자연이 되어 개개의 다른 자연과 대등한 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다른 자연을 닮게도 되는 까닭이다. 더구나 우리들의 시간이 함께 담긴 낙엽을 쓸 적엔 더욱더 이 시구가 마음에 와 닿았다.
 
며칠 전부터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책과 메리 올리버의 책을 틈이 날 때마다 읽고 있다. 특히 메리 올리버의 생각과 글에 공감하는 것들이 많았다. 가령 나는 메리 올리버가 뒷주머니에 공책을 넣고 다녔고, 30년이 넘게 거의 늘 그렇게 했고, 그 공책에는 “봄에 어떤 새들을 보았을 때, 주소, 읽고 있는 책에서 인용한 문구, 사람들이 한 말, 쇼핑 목록, 레시피, 생각들”을 적는다고 밝혔는데, 이런 기록의 습관은 나도 30년이 넘게 거의 늘 그렇게 해오고 있는 일이어서 깜짝 놀라게 했다.


내 작은 공책에도 내가 문득 본 것, 은연중에 들었던 것, 그리하여 시적 모티프로 찾아낸 대상과 상상력의 내용 등이 빼곡하게 적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때때로 공책의 기록은 그날그날의 짧은 일기가 되기도 했다.
 
공책에 무언가를 적어 남기지 않더라도 세월의 흘러감에 따른 기록은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게 될 터이다. 그리고 요즘처럼 나뭇잎이 떨어져 뒹굴고, 낙엽을 쓸고, 그 낙엽에 우리들의 시간이 들어 있다고 여기고, 한 해의 막바지를 살다 보면 자연스레 올 한 해를 살아온 일들을 기억 속에서 소환하고 그 일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비록 시시한 성과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올해 나아진 일들에 대해, 향상(向上)의 일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방울토마토와 가지와 오이와 부추 등을 재배한 텃밭의 농사는 비교적 수확이 좋아서 이웃집 사람들에게 나눠 줄 정도가 되었다. 몇 그루의 귤나무에도 귤들이 작년보다 훨씬 많이 열렸다. 종일 풀을 뽑는 일과 종일 눈을 치우는 일에 싫증이 전혀 나지 않았다. 여름날의 노란 해바라기와 가을날의 국화꽃이 활짝 피는 일을 도왔다. 화가 적었다. 나를 만나러 오는 사람을 환대했고, 갈 적에는 멀리까지 배웅을 했다. 물론 크게 나아지지 못한 일들도 많았지만.
 
낙엽을 쓸면서 나의 지나온 일과 나의 내면을 돌아보듯이 자연 속에서 살면서 많은 작품을 쓴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메리 올리버는 호수와 연못에 대한 생각을 여러 군데에서 특별히 드러냈다. 이들에게 호수와 연못은 자신들의 마음을 살피게 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 호수는 숲의 완벽한 거울”이라면서 “호수는 위로부터 새로운 생명과 움직임을 끊임없이 받아들인다”라고 찬탄했다. 심지어 그는 겨울이 되어 호수가 얼면 얼음을 깨고 얼음 위에 엎드려 호수 수면 아래의 ‘잔잔한 평온함’을 즐겨 관찰했다.
 
메리 올리버도 “몸을 기울여 물을 들여다본다”면서 연못을 ‘정직한 거울’이라고 표현했다. 시시각각의 때를 겪고 살면서 그때마다 우리들의 일과 우리들의 내면을 음미하고 돌아본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십이월 한 달을 받으면서라도 우리들의 행위와 속마음을 들여다본다면 이것 또한 올해의 막바지에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