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일 쉴때, 출근한 나에 '현타'…코로나가 한국인 바꿨다

중앙일보

입력 2022.11.29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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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사는 IT 기업 2년 차 직장인 서모(28)씨는 주 3~4회 필라테스 강사로 ‘변신’한다. 지난해 1월부터 퇴근 후나 주말을 이용해 취미 활동을 생업으로 만들었다. 수만 원짜리 돈벌이가 되는 좌담회‧토론회, 사은품 중고 매매에도 익숙하다. 서씨는 코로나19 이후 자신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는 “예전에는 야근은 늘 피했다. ‘워라밸’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 시간에 맛집을 다니거나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소비형 인간’이었는데, 이젠 돈을 모으는 게 제일 먼저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이후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변신의 이유를 설명했다.

지난 2020년 11월 30일 서울 중구 명동거리 모습.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재확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수도권 2단계, 전국 1.5단계가 유지·강화되면서 연말 특수를 노리던 자영업자들의 시름이 깊어졌던 시기다. 뉴스1

달라진 직업관…‘워라밸’보다 돈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가 한국인의 직업관에도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중앙일보가 단독 입수한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이하 직능연)의 ‘2022 한국인의 직업의식 및 직업윤리’ 조사 결과에 그런 경향이 나타나고 있었다. 
 
‘돈을 더 벌 수 있다면 현재보다 근로시간을 늘릴 의향이 있다’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비율이 57.5%였다. 2010~2018년의 같은 조사에서는 30% 내외였다. 전문가들은 현대 사회의 직업관을 대표하던 ‘워라밸(워크-라이프 밸런스·일과 삶의 조화)’이 코로나19와 경제 위기 상황으로 ‘머니 퍼스트’로 바뀌는 경향을 보여준다는 분석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다. 직능연은 1998년부터 4년마다 한국인의 직업의식을 조사하고 있으며 올해 조사에는 만 15~69세 국민 4501명이 참여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국민 절반 이상 “경제적 보상 있으면 일 더 하겠다”

초등학교 3학년‧2학년 자매를 키우는 한모(44‧서울 은평구)씨는 “소상공인 등 소득이 낮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더 어려움 겪는 모습을 보면서 위기감을 느꼈다. 가족을 지키려면 일을 더 해서라도 자산을 확보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고 최근 수년을 회고했다.
 
일의 가치를 묻는 질문에 ‘돈을 벌기 위해’가 3.88점(5점 만점)으로 가장 높았다. ‘일 자체가 좋아서 한다’는 응답은 2.99점이었고 ‘자아실현을 위해’라는 응답은 3.47점이었다. 이번 연구의 책임자인 이지연 직능연 선임연구위원은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우리 사회가 일의 가치를 인정하기보다 경제적 보상에 대한 욕구만 커진 것 같아 안타깝다”며 “학력‧직종별 임금 격차 등 구조적인 차별을 해결하고 직업의식을 높이기 위한 전 사회적인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분석했다.


직업과 관련된 여러 요소 중 가장 불만족스러운 것도 돈으로 조사됐다. 일의 영역별 만족도를 물었더니 대인관계(65.5점), 근로시간(60.4점), 작업환경(61점)에 비해 경제적 보상(57.3점)의 만족도가 가장 낮았다. 연구진은 “경제가 좋으면 일 자체에 대한 긍정 인식이 높지만, 어려울 땐 부정 인식이 많다”고 분석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삶의 만족도·행복도 뚝 떨어져

한국은행에 따르면 2020년 경제 성장률은 –0.7%였는데, 한국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한 것은 2차 석유파동 영향을 받은 1980년(-1.6%)과 외환위기에 시달렸던 1998년(-5.1%) 두 차례뿐이었다. 현실에서 겪은 경제 위기와 마이너스 숫자로 나타나는 경제성장률에 국민의 삶이 팍팍해진 셈이다.
 
돈은 개인의 안전을 담보하는 수단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모(52‧경기 고양시)씨는 회사에서 재택근무를 허용하지 않아 지하철로 출퇴근하면서 경제력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코로나19 감염 공포감을 느끼면서도 먹고 살기 위해 일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친구는 일을 쉬더라”면서 “그때 ‘돈이 있어야 건강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런 현상을 반영하듯 삶에 대한 만족도‧행복도는 조사 이후 최하를 기록했다. 2006년 66.8점에서 2010년 67.9점, 2014년 73.5점으로 상승세였던 전반적인 삶의 만족도는 2018년 72.2점으로 떨어지더니 올해 60.0점으로 크게 하락했다. 행복도는 2014년 73.9점, 2018년 73.3점이었다가 올해 60.6점으로 떨어졌다.

지난 7월 29일 서울 중구 명동 상가에 '폐점' 문구가 붙어 있다. 뉴스1

“돈만 있으면 직업 없어도 된다” 응답 증가

경제 상황의 변화는 일의 가치에 대한 생각에도 영향을 미쳤다. 코인이나 주식 투자로 불로소득을 얻는 것에 대한 선망도 커진 것으로 나타났다. “일하지 않고 돈을 받는 것은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2006년 3.70점(5점 만점)에서 2022년 3.26점으로 줄었다. 또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직업을 갖지 않고 취미생활을 하며 지내고 싶다”는 사람은 같은 기간 3.64점에서 3.77점으로 증가했다. 박영범 한성대 명예교수(경제학)는 “과거보다 직장의 불안정성이 커지고 부동산 급등으로 부를 창출하기 어려워진 상황을 반영한 것 같다”며 “사회적 위기가 커지면서 한정된 월급 내에 재산증식을 위해 일확천금에 몰입하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분석했다.
 
2018년에 도입된 ‘주 52시간 근무제’에 대한 개인의 평가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는 분석도 있다. 유홍준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특히 생산직 근로자는 초과근무 여부에 따라 수입이 크게 차이가 나는데, 주 52시간으로 ‘저녁은 있지만, 돈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불만이 적지 않았다”며 “주 52시간 근무제는 기업의 규모‧직종에 맞는 방향으로 개편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장홍근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경제가 성장하고 소득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물질만능주의 가치관이 약화하고 있었는데 코로나19를 기점으로 180도 달라진 조사 결과가 나왔다”고 말했다. 이어 “물질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약화시키려면 경제 안정화가 필요하다”며 “이를 위해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 무엇보다 중요한 만큼 정부와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직능연은 다음달 1일 연구 결과를 토대로 세미나를 개최하고, 12월 말 연구 보고서를 발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