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스텝 전망에서 힘이 빠지는 건 Fed의 긴축 속도 조절 가능성이 커지면서다. 4회 연속 자이언트 스텝(기준금리 0.75%포인트 인상)을 하며 긴축의 가속 페달을 밟았던 Fed가 ‘천천히 그러나 높고 길게(Slower but Higher & Longer)’ 전략으로 선회한 영향이다.
지난 10일(현지시간) 발표된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전년동월대비)은 7.7%로 시장전망치(7.9%)를 하회하는 등 긴축 속도를 조절할 근거도 생겼다. Fed의 2인자인 레이얼 브레이너드 부의장도 지난 14일 “곧 더 느린 (기준금리) 인상 속도로 가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지난 11일 “지난달보다 환율이 안정된 것은 좋은 뉴스”라며 “Fed의 통화정책 변화가 있으면 (한국 통화정책 기조에도)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는데 이런 변화가 감지됐다”고 말했다.
급격한 긴축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부담이다. 최근 채권시장의 ‘돈맥경화’는 강원도의 레고랜드 지급 보증 거부 사태가 트리거(방아쇠)였지만, 중앙은행의 급격한 긴축도 주된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이 총재도 지난 11일 “기준금리 인상속도가 그 어느 때보다 빨랐기 때문에 경제의 다양한 부문에서 느끼는 경제적 압박의 강도가 증가하고 있다”며 “금융안정 유지, 특히 비은행 부문에서의 금융안정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고 말했다.
말을 아꼈던 금통위원도 잇따라 금융안정에 무게를 둔 발언을 내놓고 있다. 서영경 금통위원은 지난 15일 “환율 급등(원화가치 급락)으로 인한 물가 상승 등에 대응하기 위해선 긴축 기조가 지속해야 하지만 국내 신용경색으로 전이돼 경기 부진이 우려되는 경우 긴축 기조 완화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박기영 금통위원도 지난 11일 “지금은 금융안정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 한은의 고민은 ‘높은 금리를 오랫동안 유지(higher for longer)’하는 전략의 사수 여부다. 한국은 '끈적한 고물가'가 이어지고 있다. 10월 CPI는 1년 전보다 5.7% 상승했다. 전달보다 오름폭이 둔화했지만, 여전히 한은의 물가 안정 목표(2%)를 웃돌고 있다. 특히 근원 물가(농산물·석유류 제외)는 1년 전보다 4.8%가 오르며 9월(4.5%)보다 오름폭이 커졌다.
각국 중앙은행은 경기를 의식해 긴축의 고삐를 빨리 풀었다가 물가가 다시 치솟으며 통화정책의 신뢰를 상실했던 1970년대의 ‘스톱앤고(stop and go)’ 트라우마를 경계하고 있다. 한은 내부에서도 물가가 잡히기 전에 금리 인하를 섣불리 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많다.
전날 공개된 지난 10월 금통위 의사록에 따르면 한 금통위원은 “앞으로 일정 기간 고금리 상태가 지속할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시장 충격에 어떤 방식으로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해 입장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미국과의 금리 차도 고금리를 장기간 끌고 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현재 미국의 기준금리(연 3.75~4%)와 한국의 금리 차이는 상단 기준으로 1%포인트까지 벌어졌다. 한은이 이달 베이비스텝을 밟고, Fed가 다음 달 14일 빅스텝을 밟을 경우 한·미 금리차는 1.25%포인트까지 벌어진다.
소재용 신한은행 S&T(세일즈앤트레이딩)센터 리서치팀장은 "채권시장의 자금경색과 수출 감소로 인한 경기침체 위험 등으로 물가 요인만을 고집한 통화정책을 고수할 수 없는 만큼 이번 금통위에서는 0.25%포인트 인상이라는 안전운행을 할 가능성이 높다"면서도 "고물가에 미국 금리 인상이 이어지는 만큼 한국의 금리 인상 사이클도 길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다만 주요국 경기 둔화로 인한 수출감소와 부풀어 오른 가계부채 등은 한은의 결기를 약하게 할 수도 있다. 기준금리 인상 등으로 은행권 주택담보대출 변동금리 상단은 이미 연 7%를 넘어섰다. 한국의 전체 가계대출 중 변동금리 비중은 78.5%(9월 기준)이다. 고금리를 장기간 끌고 가기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강민주 ING은행 서울지점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전날 “한은이 기준금리를 내년 1분기 3.5%까지 올린 뒤 3분기 이후엔 금리를 인하하는 사이클로 돌아설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