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고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선혈이 흘러나왔다. (중략) 마치 약물에 중독돼 죽은 사람 같았다.”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해 인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조에 대한 가장 엄정한 기록이라는 실록에 이처럼 의미심장한 문장이 등장하는 건 드문 일이다. 23일 개봉하는 영화 ‘올빼미’는 바로 이 미스터리한 역사의 한 줄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다. 역사가 미처 기록하지 못한 부분을 상상력으로 채워 넣어, 시대극인 동시에 현대적 감각이 살아있는 팩션(팩트+픽션) 스릴러를 완성해냈다.
“실록 한줄에 대한 호기심 따라가”
영화가 제목으로 삼은 야행성 조류 ‘올빼미’처럼, 침술사 경수(류준열)는 낮에는 눈이 보이지 않지만 어두워질수록 앞이 희미하게나마 보인다. 주맹증(晝盲症)이라는 흔치 않은 병을 앓는 경수는 “소인 같은 미천한 사람은 안 보이는 척이라도 해야 궁에 들어올 수 있다”며 사람들 앞에선 완전한 맹인처럼 생활한다. 그런 처지 탓에 봐서는 안 될 장면을 봐버린 경수와, 보여서는 안 될 장면을 들켜버린 이들 사이의 하룻밤에 걸친 대립과 사투가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소현세자 ‘독살설’ 바탕으로 상상력 발휘
병자호란 패배를 인정하며 청 태종 앞에 무릎 꿇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던 인조는 인질로 청에서 지내는 동안 신문물에 눈뜨고, 청과 우호적인 관계를 쌓은 소현세자를 크게 경계했다고 전해진다. 본인 스스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만큼, 청나라의 신임을 받는 세자가 자신을 축출하진 않을까 위협을 느꼈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영화가 보여주는 소현세자의 사망 이후 석연찮은 인조의 대처, 세자의 부인 강빈(조윤서)을 향한 탄압 등도 모두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한 내용이다. 영화는 실록이 빈 칸으로 남겨둔 부분에서만 상상력을 발휘함으로써 고증 오류 논란을 최소화하는 영리한 선택을 한 셈이다.
주맹증이라는 소재도 이 영화만의 독특한 질감을 완성하는 재미 요소로 적잖은 역할을 한다. 제작진은 주맹증을 화면에 구현하기 위해 스타킹과 물주머니로 카메라 앞을 씌우는 등의 촬영 방법을 고안했다고 한다. 불이 하나둘 꺼질수록 흐릿하게 앞이 보이는 경수의 시야를 똑같이 체험하게 되는 관객은 주변의 작은 움직임과 소리에 더 크게 눈귀를 열게 된다. 눈앞이 답답한 가운데 다른 감각들이 예민하게 살아나는 경험이 제법 신선하게 다가온다.
인생 첫 왕 역할 유해진 “등장에 웃을까 걱정”
경수 역의 류준열도 자칫 어색해 보일 수 있는 맹인 연기를 흠잡을 데 없이 해냈다. 진실을 목격하고도 보이지 않는 척 초점 잃은 표정 연기부터 소현세자의 죽음을 밝혀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다가도 두려움에 떠는 모습까지, 시시각각 휘몰아치는 감정 연기가 극의 흡인력을 높인다. 길지 않은 분량에도 존재감을 잃지 않은 소현세자 역의 김성철을 비롯해 후궁 소용 조씨 역의 안은진, 강빈 역의 조윤서 등 비교적 새로운 얼굴들도 뇌리에 남는 연기를 선보인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의 전개가 부실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긴장감이 사라지고 나서도 궁금증의 여운이 남게 되는 건 영화의 또 다른 장점이다. “눈 감고 사는 게 더 좋을 때가 있다”, “못 본 척해야 살 수 있다”는 말을 버릇처럼 하던 경수가 종국에는 “내가 분명히 보았다”고 울부짖는 지점에서 관객들은 진실에 침묵하지 않는 이들의 용기, 혹은 때로 진실에 눈감는 이들의 비겁함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