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판 세월호' 힐스버러 참사의 교훈
주말 점포 대부분 문 닫은 이태원, 현장에 유가족 단체 없어
“공무원들이 매칭이 돼 장례 지원 등 도움을 준 건 맞는데 장례 후에는 정부 차원에서 지원이라거나 특별한 게 없었다고들 합니다. 정부 차원의 가족 지원책이 교통정리가 안돼 그때 담당했던 공무원들도 뭘 하긴 어려웠을 것 같긴 한데, 유가족들은 당시 지원해준 공무원의 소속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양 변호사에 따르면 유가족들은 정부가 설명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 데 대해 아쉬워하고 있다. “숨진 자녀가 어느 병원에 있다고 해 가보니 영안실에 있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과정을 통해 병원에 왔는지, 후송은 언제 됐고, 후송 후 어떤 조치가 있었는지, 병원에서 치료받다 숨진 건지 등을 설명해주지 않아 답답해 했습니다.” 병원 직원들도 잘 모르는 상황이었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119 일지 등에 담겨 있을 테니 유가족이 정보공개 청구를 하지 않더라도 정부가 원하는 이들에게는 알려준다고 고지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양 변호사는 “공무원들은 가족에게 설명해주기보다 윗선 보고가 우선인 것 같다”고 꼬집었다.
양 변호사는 유가족의 국가배상 청구 소송을 도울 생각이다. 대한변협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도 지원 TF를 만들겠다고 해 추이를 보고 있다. 그는 “국가배상 소송은 당연히 가능한데 정부가 특별법을 만들든지 기존 국가배상법에 따라 적절한 기준을 제시하면 좋겠다”며 “세월호 배·보상이 지금도 소송 중인 것을 보면 빠른 절차를 고민하는 게 정부 역할”이라고 말했다.
"장례 도운 뒤 정부 특별한 지원 없어"…동의 없이 명단도 공개
자녀 등을 잃은 슬픔을 각자 이겨내고 있는 가족들에게 희생자 명단이 자신들의 동의 없이 공개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인터넷 매체 ‘민들레’가 희생자 실명이 담긴 포스터를 홈페이지에 올렸다. 일부 단체가 이 매체와 명단을 유출한 공무원 등을 고발했다.
양 변호사는 “접촉해온 유가족들은 희생자 명단 공개는 지금 단계에선 원치 않는다고 했었다”며 “명단 공개로 인해 힘든 상황에서 관심이 집중될 수 있기 때문에 당장은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유가족들은 자신들이 전체 의사를 대변하지 않기 때문에 개별 입장을 발표하는 것도 조심스러워했다. 그런 점에 비추어 유가족의 동의가 없는 명단 공개는 당연히 안 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라고 양 변호사는 덧붙였다.
이태원 참사의 책임 소재를 가리는 경찰 특별수사본부의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사전에 충분히 예상됐던 안전사고 위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공직자들의 잘못이 명백히 밝혀져야 관련 공직 사회가 향후 고삐를 단단히 죄도록 할 수 있다. 하지만 유가족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미흡하다. 처벌과 책임 추궁에만 매달리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시스템의 직접적 피해자인 유가족의 아픔은 치유되지 못한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나자 비유 대상으로 거론된 게 ‘영국판 세월호’로 불리는 ‘힐스버러 참사’다. 1989년 4월 15일 영국 중부 셰필드 웬즈데이 힐스버러 축구장에서 97명이 압사 사고로 숨졌다. 당시 사망자도 10대 38명, 20대 40명 등 젊은 층이 대다수였다. 해당 축구장에선 영국 축구협회컵 준결승전이 열렸다. 경기 시작 임박 때까지 리버풀 축구클럽 응원단이 입장하지 못한 상황에서 현장 경찰관이 한 명씩 입장하는 회전 출입구 대신 퇴장 때 쓰이는 문을 열어주는 실수를 저질렀다. 내부 입석 관객석이 이미 인파로 들어찬 상태였는데 추가로 팬들이 몰리자 압사 사고가 일어났다. 30분간 부상자도 700여 명이 발생했다.
경기장 외부에서 지휘하던 경찰 책임자는 전근 2주밖에 되지 않아 축구장 내부 구조도 모르는 상태였다. 1981년 해당 경기장에서 30여 명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지만 제대로 개선되지 않았다. 사고 후 앰뷸런스 40대가 출동했지만 현장 판단 미흡으로 1대만 경기장 안에 들어가는 인재였다.
하지만 사고 원인은 술에 취한 극성 팬들의 잘못으로 몰아져 갔다. 일부 언론은 '만취한 리버풀 팬들이 구조 활동을 하던 경찰을 방해했다'고 보도했다. 이후 진행된 재판에서도 경찰의 일부 판단 미흡이 있긴 하지만 팬들의 횡포에 따른 단순 사고사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유가족들은 범죄자 가족이라는 오명을 쓴 채 외롭게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처지가 됐다.
힐스버러 조사위, 자료 웹사이트에 투명하게 올려 진상 규명
2012년 9월 발간된 조사위 보고서 서문에서 존스 위원장은 4세기 철학자 락탄티우스의 말을 인용한다. ‘정의의 핵심은 우리가 애정을 갖고 우리 가족에게 제공하는 것을 인간애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유가족과의 만남이었다. 존스 위원장은 “조사위는 활동 개시 첫날 유가족 모임 세 곳과 만났다. 그날 유가족과의 회의는 2년 반 동안 진행된 조사위 활동의 기초였다. 조사 기간 내내 우리는 유가족과 연락을 취했고, 모임에 속하지 않은 여러 가족도 포함됐다”고 밝혔다.
조사위가 도입한 진실 규명 작업은 방법론 측면에서도 교훈을 준다. 조사위는 참사 관련 자료와 정보를 별도 홈페이지를 통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공개했다. 그때까지 영국에선 통상 30년이 흘러야 공공기관 자료가 공개됐는데, 이를 20년으로 단축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를 계기로 80개 이상의 기관과 조직 등이 참사 관련 자료를 조사위에 제출했고, 45만 여 쪽의 자료가 웹사이트에 공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