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뒤 그 대의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지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 법원에 취직하는 것보다 먼저 교도소에 들어가야 되겠소. 당신은 법원 직원을 폭행까지 한 사람이니까 먼저 교도소 갔다 온 뒤에 취직을 시키든지 말든지 내가 하겠소. 와서 그 직원한테 사과하지 않으면은 내가 당장에 고발하겠소.” 그러자 깜짝 놀란 대의원이 장흥지원을 찾아 직원에게 사과했다. 지원장은 그 대의원에 주의를 주고 돌려보냈다.
고인은 전남 해남 출신으로 광주고, 연세대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10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 공군 법무관으로 근무한 뒤 1962년 광주지법 순천지원 판사로 임관했다. 고인은 광주고·지법 판사, 대법원 재판연구관, 장흥지원장, 순천지원장 등 13년간 향판으로 일하다 서울민·형사지법 부장판사에 발탁됐다. 이후 광주·서울고법 부장판사, 서울지법 북부지원장, 서울고법 수석부장판사, 청주·전주지방법원장을 거쳐 86년 대법관(당시 대법원 판사)에 임명됐고, 89년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지냈다.
고인은 김영삼 정부 때인 93년 12대 대법원장에 임명돼 99년 퇴임했다. 대법관 재직 중 대법원장에 임명된 첫 사례이자 유태흥 전 대법원장 이후 13년 만에 임기를 채운 대법원장이었다. 고인에겐 문민정부 첫 대법원장, 20세기 마지막 대법원장이란 타이틀도 있다. 재임 중 사법부 독립 100년(1895년 재판소구성법 제정)을 맞이했고, 95년 대법원 청사를 서소문에서 서초동으로 이전하며 ‘서초동 시대’를 연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시대적 상징성을 고인은 93년 9월 자신의 취임사에 ‘사법부의 대전환기’라고 직접 표현했다.
고인은 특히 법정 내 진행 방식에 관심을 기울였다. 77년 서울형사지법 부장판사 시절 첫 재판에서 교도관의 난색에도 피고인들이 찬 수갑을 풀도록 한 건 잘 알려진 일화다. 형사소송법에 어긋나는 관행을 바로잡은 것으로 고인은 생전 인터뷰에서 “시골 사람(향판)이 와서 비로소 발견하고 옳게 고친 셈”이라고 회고했다. 서울지법 북부지원장 시절엔 판사들에게 법정에서 스스로 녹음하도록 한 뒤 집에서 가족들 앞에서 틀어보라고 해 법정 개선안을 마련하는 등 높기만 했던 법대를 낮추는 데 기여했다. 모든 재판 진행을 녹음한 덕에 위증이 줄어든 건 덤이었다. 전주지방법원장으로 재직하면서는 일본어, 어려운 한자 등을 알기 쉬운 우리말로 바꿔 『우리말 바로쓰기』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고인이 대법원장에 임명될 땐 대전·의정부지법 법조비리 등으로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치던 때라 당시 언론은 고위 법관 중 꼴찌였던 그의 재산 순위를 조명하기도 했다. 대법원장 재임 땐 외부행사가 없는 한 점심을 구내식당에서 가져와 집무실에서 홀로 먹어 ‘수도승’이란 별칭이 붙었다. 중앙선관위원장 시절엔 92년 14대 대선 관리를 맡아 ‘공명선거’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힘썼다. 대선에서 낙선한 정주영 당시 국민당 후보가 중앙선관위를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의 끄나풀’이라고 비난하자 “전국 선관위에는 판사가 350명이 투입돼 있는데, 이 사람들이 안기부의 끄나풀이란 근거가 있으면 하나라도 대라”고 반박해 직접 사과를 받아낸 일화도 있다.
고인은 2015년 법원도서관의 구술 채록 당시 “판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외부로부터 독립도 지켜야 하지마는 나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저울에다 올려놓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성찰하라”는 말을 남겼다. 대법원은 장례를 법원장(葬)으로 치를 예정이다. 유족으론 부인 오현씨와 아들 준(광주고등법원장)·영신(에듀조선 대표)·영보·영두씨가 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16일 오전 9시, 장지는 대전 현충원이다. ☎02-2227-7500.
참고문헌
법원도서관, 『법관의 길 윤관(대한민국 법원 구술총서①)』, 2021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