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랜드발 돈가뭄…정부 ‘50조+α’ 수혈

중앙일보

입력 2022.10.24 00:13

수정 2022.10.24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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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회사채와 단기 자금시장의 자금경색 해소를 위해 50조원 이상의 유동성을 공급하기로 했다. 강원도의 레고랜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채무 불이행 사태가 촉발한 채권시장의 ‘신뢰 위기’를 진화하기 위해서다. 최고 신용등급(AAA) 채권의 미매각이 속출하고, 단기기업어음(CP) 금리가 급등하는 등 채권시장은 몸살을 앓고 있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23일 서울 은행회관에서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를 열고 ‘50조원+α’ 규모의 시장안정 조치를 발표했다. 이날 회의는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이창용 한은 총재, 김주현 금융위원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 등이 참석했다.
 
추 부총리는 “정부와 한은은 대내외 복합 요인으로 인해 현재의 시장 상황이 매우 엄중하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하면서 필요시에는 가용한 정책수단을 총동원해 시장 불안에 적기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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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정부 대책은 채권시장 유동성 공급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총 20조원 규모의 채권시장안정펀드(채안펀드)를 조성해 투입할 방침이다. 우선 24일부터 채안펀드 가용재원 1조6000억원을 활용해 회사채와 CP 매입을 재개한다. 매입 대상에는 시공사가 보증한 프로젝트 파이낸싱(PF) ABCP도 포함된다. 나머지 채안펀드 재원은 각 금융기관에 자금요청(캐피털콜)을 해 증액할 방침이다.


또한 산업은행·기업은행·신용보증기금 등 정책금융기관의 회사채와 CP 매입 규모를 8조원에서 16조원으로 2배로 늘린다. 증권사 등 금융회사가 발행한 CP도 매입 대상에 포함한다. 한국증권금융 재원을 통해 일시적으로 유동성이 부족한 증권사에 3조원 규모의 유동성 지원도 한다.
 
강원도의 지급보증 거부 사태 등의 재발 방지도 약속했다. 추 부총리는 “지방자치단체(지자체) 보증 ABCP에 대해서는 모든 지자체가 지급보증 의무를 성실히 이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단기자금도 말라 CP금리 4.25%로 급등…금융위기 후 처음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23일 서울 은행회관에서 열린 비상 거시경제금융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추 부총리, 김주현 금융위원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연합뉴스]

부동산 PF에 대한 주택도시보증공사·주택금융공사의 사업자 보증 지원은 10조원 규모로 확대한다.
 
정부가 이날 50조원이 넘는 자금을 채권시장에 공급하기로 한 건 ‘돈맥경화’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3년물 기준으로 국채와 회사채(AA-)의 금리 차(스프레드)가 지난 21일 1.3%포인트까지 벌어졌다. 세계 금융위기이던 2009년 9월 이후 최고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거시경제 위험 신호도 켜졌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한국의 국가부도 위험을 나타내는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지난 21일 0.62%포인트(62bp)로 연초 대비 2배로 뛰었다.
 
투자심리가 얼어붙으며 한국전력이 발행하는 한전채(AAA)도 미매각이 발생할 정도다. 단기자금 시장에서는 자금경색이 심해지고 있다. CP 금리(A1 등급, 91일물)는 지난 21일 연 4.25%로 전날보다 0.15%포인트 뛰었다. CP금리가 4%를 넘어선 건 2009년 1월 28일(연 4.09%) 이후 처음이다.
 
건설사의 경우 PF와 관련된 기업어음 차환이 어려워지며 ‘흑자도산’ 우려마저 나온다. 나이스신용평가에 따르면 올해 말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증권사와 건설사가 보증을 선 PF ABCP와 PF 자산유동화전자단기사채(ABSTB) 규모는 32조3908억원이다. 시장에서 소화되지 않으면 보증을 선 건설사와 증권사 등이 이를 떠안아야 한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유동성의 블랙홀’이 된 은행으로의 자금 유입에도 제동이 걸렸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20일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규제 정상화를 6개월 유예하기로 했다. LCR 비율을 맞추기 위해 은행채 발행 등이 늘어나는 걸 막기 위해서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LCR 규제도 필요하면 더 조정하겠다”고 말했다.
 
‘50조원+α’의 유동성 공급 조치로 일단 채권시장으로 불이 옮겨붙는 걸 막기는 했지만 미봉책일 뿐이다. 금리 상승기에 약한 고리인 부동산 PF 대출 급증은 그야말로 화약고다. 특히 상대적으로 규제가 약한 비은행권에서 PF 관련 투자가 급증하며 폭발력은 더 커졌다.
 
보험·저축은행·증권사 등의 대출 잔액은 13조8000억원에서 84조원으로 급증했다. 특히 ABCP 등 PF유동화증권 중 증권사가 채무보증을 선 액수는 2013년 말 5조9000억원에서 지난 6월 말 기준 24조9000억원으로 4배로 뛰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부동산 관련 대출은 금리 상승기에 가장 취약한 부분인데 여기서 신뢰의 위기가 발생했다”며 “금리를 인상하더라도 유동성 위기로 흑자 도산을 하는 일 등은 막아준다는 명확한 신호를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중소형 증권사들이 호황기 때는 고위험 투자를 하며 이익을 보다 위기 상황이 오니 정부에 손을 벌린다는 지적도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아직 본격적인 위기도 아닌데 일부 금융사가 자금난을 겪는다는 지라시성 정보와 강원도의 무책임한 행보로 정부 입장에서 비상시 쓸 카드를 미리 꺼내게 돼 향후 정책 여력이 줄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