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의 빈자리는 즉각 장남 찰스 3세 국왕이 채웠다. 하지만 ‘영국’ 하면 저절로 떠오르던 ‘여왕’의 상징성은 텅 빈 채 그대로다. 96세 70년 재위라는 역사적 숫자가 말해주듯, 여왕은 ‘항상 그대로의 존재’였고, 그 한결같음으로 영국을 넘어 영연방을 묶는 구심점이 됐다.
생전 여왕은 “의무가 먼저고 나 자신은 다음”이란 헌신의 자세로 유명했다. 영국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에 등장하는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는 대사에 부합한 삶을 살았다.
유별나게 강한 책임감은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로 인한 트라우마의 발현이기도 하다. 의무보다 개인의 자유·낭만이 우선이었던 그는 왕관 대신 사랑을 택했다. 그 결과 동생 조지 6세, 조카인 여왕의 삶까지 송두리째 바꿔놨다. 왕관 앞에서 여왕이 보인 헌신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도 읽힌다.
찰스 3세는 애도 기간, 공개 석상에서 두 번의 ‘왕짜증’으로 구설에 올랐다. 한번은 방명록에 서명하다 잉크가 손에 묻었다고, 다른 한 번은 책상 위 펜대를 치우라면서다. 이 짜증 영상은 ‘#NotMyKing(나의 왕이 아니다)’ 해시태그와 함께 퍼졌다.
국왕은 여왕의 서거로 왕위와 함께 5억 달러(6900억원)의 재산, 343억 달러(47조원)의 부동산을 상속했다. 버킹엄 궁전 등 런던 전역의 왕실 소유 토지까지 모두 찰스 3세의 몫이 됐다. 상속세는 한 푼도 안 냈다. 개인보다 국가를, 권리보다 의무를 최우선에 두라는 ‘왕관의 무게’ 값이다.
왕관의 무게를 재는 저울추는 국민 삶의 무게다. 영국 국민은 어느 때보다 춥고 배고픈 겨울을 앞뒀다. 당장 다음 달 가계 에너지 요금부터 80% 인상된다. 군주제 폐지론자들은 “내 집 난방비도 부족한데, 왜 세금으로 왕실 교부금(1590억원)을 내냐”고 외친다. 올겨울, 찰스 3세가 더 무거워진 왕관의 무게를 가늠하지 못하면 ‘#NotMyKing’은 현실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