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분수대] 왕관의 무게

중앙일보

입력 2022.09.22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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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수 국제팀 기자

여왕이 떠났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지난 19일(현지시간) 열흘간의 길고도 호화로운 장례 절차를 마치고 남편 필립공 곁에서 영면에 들었다. 동그란 눈동자, 반짝이는 은빛 머리, 온화한 미소는 이제 지난 기억이 됐다.
 
여왕의 빈자리는 즉각 장남 찰스 3세 국왕이 채웠다. 하지만 ‘영국’ 하면 저절로 떠오르던 ‘여왕’의 상징성은 텅 빈 채 그대로다. 96세 70년 재위라는 역사적 숫자가 말해주듯, 여왕은 ‘항상 그대로의 존재’였고, 그 한결같음으로 영국을 넘어 영연방을 묶는 구심점이 됐다.
 
생전 여왕은 “의무가 먼저고 나 자신은 다음”이란 헌신의 자세로 유명했다. 영국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에 등장하는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는 대사에 부합한 삶을 살았다.
 
유별나게 강한 책임감은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로 인한 트라우마의 발현이기도 하다. 의무보다 개인의 자유·낭만이 우선이었던 그는 왕관 대신 사랑을 택했다. 그 결과 동생 조지 6세, 조카인 여왕의 삶까지 송두리째 바꿔놨다. 왕관 앞에서 여왕이 보인 헌신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도 읽힌다.


찰스 3세는 애도 기간, 공개 석상에서 두 번의 ‘왕짜증’으로 구설에 올랐다. 한번은 방명록에 서명하다 잉크가 손에 묻었다고, 다른 한 번은 책상 위 펜대를 치우라면서다. 이 짜증 영상은 ‘#NotMyKing(나의 왕이 아니다)’ 해시태그와 함께 퍼졌다.
 
국왕은 여왕의 서거로 왕위와 함께 5억 달러(6900억원)의 재산, 343억 달러(47조원)의 부동산을 상속했다. 버킹엄 궁전 등 런던 전역의 왕실 소유 토지까지 모두 찰스 3세의 몫이 됐다. 상속세는 한 푼도 안 냈다. 개인보다 국가를, 권리보다 의무를 최우선에 두라는 ‘왕관의 무게’ 값이다.
 
왕관의 무게를 재는 저울추는 국민 삶의 무게다. 영국 국민은 어느 때보다 춥고 배고픈 겨울을 앞뒀다. 당장 다음 달 가계 에너지 요금부터 80% 인상된다. 군주제 폐지론자들은 “내 집 난방비도 부족한데, 왜 세금으로 왕실 교부금(1590억원)을 내냐”고 외친다. 올겨울, 찰스 3세가 더 무거워진 왕관의 무게를 가늠하지 못하면 ‘#NotMyKing’은 현실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