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의 피아니시모, 야외의 7천 청중 숨죽이고 경청했다

중앙일보

입력 2022.09.01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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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밤,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야외공연을 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조성진. 사진 크레디아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을 가득 메운 청중과 화려한 조명은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연주되는 클래식 음악과 조용히 경청하는 관객들의 모습은 무척 특별하게 다가왔다. 지난달 31일 밤 크레디아 프롬스 ‘조성진 그리고 쇼팽’ 얘기다. 
 
공연기획사 크레디아의 야외 콘서트인 ‘파크콘서트’는 주로 올림픽공원 잔디마당에서 열렸다.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크레디아 프롬스’는 그 연장선상에 있는 야외 공연이었다.
 
‘피켓팅’(피가 튀길 정도로 치열한 티켓 구매 경쟁)으로 유명한 조성진(28)은 이번에도 예외 없었다. 7000여석이 오픈 직후 전석 매진됐다. 네이버TV로 생중계되는 유료 온라인 관람권(2만원)도 5000장이 판매됐다.
 

두 곳의 입구를 통해 많은 청중이 입장하느라 공연 시작이 15분 지연됐다. 구름 한 점 없고 춥지도 않은 날씨는 최고였지만 제작진은 조명을 보고 날아든 벌레와 싸워야 했다. 부득이 모기 기피제를 바르고 나온 조성진은 건반 위 벌레 잔해를 치우고 연주를 시작했다.



핀란드 방송교향악단 클라리넷 부수석 김한(25)과 함께한 프랑스 작곡가 프랑시스 풀랑크의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는 통통 튀는 밝은 색채감과 그 뒤에 잔영같은 미묘한 우울이 공존하는 작품이었다. 예원학교 후배이자 소년 시절부터 클라리넷의 모든 것을 보여줬던 김한의 능란함과 프랑스 음악을 장기로 하는 조성진의 날렵한 센스가 돋보였다. 이어진 거슈윈의 프렐류드 1번에서도 두 연주자는 맞아 떨어지는 호흡으로 재즈와 블루스의 재기 발랄함을 펼쳤다. 관객들이 야외 공연장의 음향에 적응하기 좋은 애피타이저였다.
 

쇼팽 협주곡 2번과 1번은 크레메라타 발티카와 함께했다. 그 사이에 위치한 2부 첫곡 쇼팽 녹턴 Op.62-2는 조성진 없이 빅토르 키시네가 편곡한 현악 합주 버전으로 연주했다.
조성진은 2017년 크레메라타 발티카와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협연했고 2018년 독일에서 함께 연주했다. 그 뒤 4년 만에 호흡을 맞춘 무대였다. 
 
20여 명 현악 앙상블의 연주는 관악기가 첨가된 원 편성과 달리 단출한 느낌이었다. 가을에 어울리는 실내악적인 현의 울림이었다. 두 피아노 협주곡 모두 예브게니 샤를라트가 편곡한 악보를 썼다. 목관악기, 금관악기, 팀파니가 빠지고 호른이나 바순 등 관악기로 익숙한 부분을 첼로 같은 현악기가 처리하는 대목은 생소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조성진의 피아노는 더욱 부각됐다. 특히 야외 공연에서 피아노의 여린 피아니시모가 들려온 건 흔치 않은 체험이었다.
 

지난달 31일 밤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야외공연은 청중의 매너도 돋보였다. 악장 간 박수나 벨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다들 연주에 집중하고 경청했다. 사진 크레디아

 
음향을 담당한 톤 마이스터 최진은 “스피커 위치와 연주자 위치 선정에 공을 들였다”며 “있는 듯 없는 듯한 음향에 초점을 맞췄다”고 했다. 아레나형으로 돼 있는 연대노천극장의 장점을 살려서 클래식 홀의 음향을 야외에 옮기려는 시도였다. 그는 “청중 수에 따라 잔향이 감소한다. 잔향이 적으면 현에서 ‘땡땡’ 쏘는 소리가 난다. 리허설 때 예상했던 잔향과 많이 달라 공연 시작부터 보정에 들어갔다”며 “악기 자체의 자연스러움을 살리다 보니 확성을 덜 해서 전체적으로 음량이 작아졌다. 상대적으로 몰입도가 커졌다”고 말했다.

 
무대 위 조성진의 모습은 평소보다 멀리 있었지만 두 개의 대형 스크린에는 손가락의 움직임까지 명확하게 포착됐다. 2015년 쇼팽 콩쿠르 우승 당시 바르샤바에서 연주했던 협주곡 1번은 훨씬 더 여유로웠다. 간절하고 아찔한 기교에도 연륜이 느껴졌다. 조성진이 “쇼팽이 작곡한 가장 아름다운 선율”이라고 했던 협주곡 2번 2악장은 이날의 백미였다. 탁 트인 밤하늘과 어우러져 낭만적으로 퍼져갔다.

 

앙코르는 드뷔시 ‘달빛’이었다. 조명이 내려와 조성진을 둥글게 비추니 무대 위 달의 중심에 피아노가 있는 듯했다. 영롱하게 울리는 피아노의 한 음 한 음에 귀 기울이니 주변의 풀벌레 소리가 훨씬 더 크게 들렸다. 이날 청중 7000여 명의 매너도 돋보였다. 악장 간 박수나 벨소리 등이 들리지 않았다. 연주에 집중하고 경청하는 성숙한 태도는 여느 음악홀보다도 나았다. 이번 ‘조성진 그리고 쇼팽’은 야외 음악회의 성격을 확성하는 ‘발산’에서 경청하는 ‘수렴’으로 바꾼 사례로 기록될 만했다.
 

류태형 객원기자・음악칼럼니스트 ryu.taehy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