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현민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이 지난 22일 페이스북에 이렇게 올렸다. 그가 이 글을 쓴 이유가 있었다. 같은 날, 패션지 보그 코리아가 청와대에서 촬영한 화보를 공개했는데, 이게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화보 촬영은 문화재청의 청와대 국민개방추진단과 보그 코리아의 협업으로 이뤄졌다.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를 담는 패션 아이템으로서의 한복을 탐구하는 기획 차원에서 이런 상징성을 가진 장소인 청와대를 배경으로 골랐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기획을 놓친 다른 패션지들이라면 배가 아플 법하다.
5년 만에 정권을 빼앗긴 지난 문재인 권력의 핵심 인물인 그가 억울해하는 속내야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말이 너무 심하다. 지금 개방된 청와대가 일제 시대 당시 동물원이 된 창경궁이라면, 톱모델 한혜진을 비롯해 그곳에서 사진 찍은 모델들은 사자·기린·코끼리·북극곰인가? 또 청와대 개방 이후 그곳을 찾은 100만 명 넘는 시민은 '일본에 나라 빼앗기고도 좋다고 놀러 다니던 조선인'이라는 말인가?
식민지 조선인에게 그리 큰 반감을 불러일으킬 일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실제로 창경원은 개원부터 관람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나중에는 일본인·대만인·오키나와인 등도 와서 구경하는 서울의 첫 손꼽히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네이버의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1909년 11월 1일 전후의 옛날 신문을 펼쳐보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탁현민은 왜 굳이 반일감정을 들쑤시면서 청와대 개방을 일제 시대 창경원에 비유하는 무리수를 뒀을까. 한일관계뿐 아니라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이로움 하나 없이 해롭기만 한데도 말이다. 아닌가. 외교 문제는 그렇다 치고 일단 문화, 특히 대중문화 분야에서 영향력이 큰 '문빠' 세력을 등에 업은 탁현민이 이를 대놓고 비난하는 건 상식의 틀을 깨는 예술 본연의 기능을 심각하게 위축시킨다는 문제가 있다. 실제로 탁현민의 페이스북 포스팅 이후 화보를 찍은 보그 코리아와 한혜진을 향한 비난이 적지 않았다. 이처럼 정치적 목적 없는 문화적 행위를 정치적 잣대로 손가락질하는 분위기를 만든다면 문화예술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경복궁에서 열리기로 돼 있던 글로벌 패션 브랜드 구찌 패션쇼가 취소된 것에서도 탁현민의 '나쁜 영향력'이 드러난다.
게다가 어설픈 물타기 발언 이후에도 탁현민은 반일주의에 기반한 대중적 분노 유발을 결코 멈춘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이날 출연한 같은 방송에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한복을 알리기 위해 찍었다고 설명하던데, 다른 여러 복장도 있고 심지어 일본 아방가르드 대표 디자이너인 류노스케 오카자키 작품도 있다." 일본이라는 키워드를 들이대 일본을 향한 대중의 반사적 분노를 자아내 보려는, 식상하지만 대체로 잘 통하는 선동 기법을 다시금 꺼내 들었다.
이런 선동가의 말에 속지 않으려면 생각을 해야 한다. 문화재청이 스스로 밝힌 취지는 한복의 고증이 아니다. '한복의 새로운 현대적 해석'을 제시하는 거다. 당연히 우리의 눈에 한복과 다른 복장이 섞일 수밖에 없다. 전위적인 패션지의 성격상 다소 과감하게 성적 매력을 어필하는 의상이 포함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걸 왜 반일 감정이나 기생과 연결하나. 한복에 신선한 멋과 개념, 약간의 성적 기호를 가미한 게 문제가 아니라 이런 참신함이 더해졌다고 곧장 기생을 떠올리며 욕하는 사람이 문제다.
일본 디자이너 얘기도 해보자. 류노스케 오카자키는 일본의 대표적, 아니 글로벌한 아방가르드 패션 디자이너다. 그가 '한복의 재해석'이라는 테마로 청와대라는 무대에서 자기 의상을 소개하는 게 뭐가 문제인가? 고작 20여 년 전만 해도 보통 사람은 물론이요 한국의 소위 '패션 피플'이라는 사람들조차 일본 패션 잡지를 보고 따라 하기 급급했다. 하지만 이제는 일본 디자이너가 한복을 테마로 작업을 한다. 부끄럽고 치욕스럽기는커녕 자랑스럽고 뿌듯한 '문화 독립 선언' 아닐까.
탁현민의 발언은 상대 진영이 내 권력을 빼앗아 가니 '청와대를 더럽힌다'는 식의 온갖 전근대적 전제 위에 반일 선동을 어지럽게 뒤섞어 놓은 데 불과하다. 그런 면에서 솔직히 무시해도 그만이다. 하지만 침묵하는 문화예술인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정치가 대중 감정을 들쑤셔 문화 예술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걸 보고도 입 꾹 다물고 있는 편향적 문화예술인들, 지금 침묵하려면 영원히 침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