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비밀보호법(통비법) 제16조 1항 1호의 내용이다. ‘타인간의 대화를 녹음 또는 청취한 자’를 ‘대화 참여자 모두의 동의 없이 대화를 녹음한 대화 참여자’로 바꾼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금은 통화나 대화 당사자가 아닌 사람의 몰래 녹음만 처벌대상이지만 바뀐 문구에 따르면 통화나 대화 당사자도 상대방의 동의 없이 녹음했다면 처벌된다. 제보나 취재 목적으로 상대방과의 통화를 녹음하는 행위도 상대방이 동의를 하지 않았다면 범죄가 될 수 있고, 일방의 통화 녹음을 증거삼아 범죄자를 처벌하는 일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국산 스마트폰에선 아예 통화녹음 기능이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기능을 제공하는 것 자체가 불법 녹음을 방조하는 성격을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입법이 실제 시도되고 있다. 국민의힘 중진 윤상현 의원이 이같은 처벌 범위 변경을 골자로 하는 통비법 개정안을 지난 18일 내놨다. 아직 상임위 소위 논의도 시작되지 않았지만 이미 이 법안을 둘러싼 장외 논란이 뜨겁다.
동의 없는 녹음은 불법? 통비법 개정 논란
그러나 반대가 만만찮다. 그중 가장 난색을 표하는 건 경찰관·검사 등 수사 실무자들이다. 스마트폰이 일반화된 이후 초동 수사의 성패는 압수수색에서 혐의자의 휴대폰을 확보하느냐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 법이 통과되면 대부분의 통화 녹음 파일은 위법수집증거가 돼 증거능력이 부인되기 때문이다.
20년 경력의 경찰 수사관은 “혐의 입증이나 수사에 필요한 주요 증거 확보가 무척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수사파트의 경찰 간부도 “동의 없는 통화 녹음의 증거 능력이 부인된다면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데 난항을 겪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부장검사 출신 한 변호사는 “녹음이 담고 있는 미묘한 분위기나 정황도 증거가 되기 때문에 이를 금지한다면 피해자만 억울할 상황이 많이 생길 것 같다”고 말했다.
공익제보의 담장을 높힐 거라는 우려도 나온다. 정국정 공익제보자모임 대표는 “각종 갑질 등을 알리는 공익 제보에서는 녹음이 유일한 증거”라며 “동의를 받아야 한다면 사실에 기반을 둔 증거는 나올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정치인 비리를 폭로한 적 있는 공익제보자 A씨는 “재판에서도 통화 녹취가 가장 결정적인 증거였다”며 “거대 권력과 맞설 때 녹음이 없었다면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업사원이나 보험설계사 등 직업적 이유로 통화녹음 기능을 즐겨 사용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법안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큰 편이다.
정치인만 안심하는 법?
선거철이면 정치권에서는 ‘녹음 파일’로 인한 파문이 자주 일었다. 지난 20대 대선에서는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 배우자 김건희씨의 이른바 ‘7시간 녹음 파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친형·형수 욕설 파일’도 모두 상대방 동의 없이 진행된 통화 녹음이었다. 법안을 발의한 윤 의원도 2020년 4·15 총선 기간 ‘함바왕’ 유상봉씨와 나눈 통화 녹음 파일 등으로 선거 공작 의혹(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휩싸였다가 지난 12일 2심에서 가까스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익명을 원한 정치권 관계자는 “녹음 희생양이 된 정치인 사례가 많고 녹음은 평생 꼬리표가 되기 때문에 개정안에 속으로라도 찬성하는 의원들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계에선 신중론이 나온다. 최경진 가천대 법학과 교수는 “본인 포함 대화에 대한 규제 논의가 한국에서는 이제 시작된 것”이라며 “스마트폰 대중화 등으로 녹음은 가능하다고 보는게 국민적 시각이라면 공유·유출 등을 엄격하게 규제하는 등 음성권 보호 범위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음성권 보호와 자기 방어라는 두 가지 자유가 충돌하는 문제”라며 “사회적인 합의를 위한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정치인은 자신들의 필요 이상으로 여론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며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이라면 법안 통과가 낙관적이지는 않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