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선생님(DJ)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정치는 현실이다. 서생적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도 좋지만, 상인의 현실 감각도 가져야 하고, 이 두 가지가 합리적으로 잘 조화되는 것이 좋다.”
지난 16일 저녁 JTV 주최 토론회를 보던 중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후보 발언에 귀가 번쩍 뜨였다. 이 후보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과정에서 탈당했던 민형배 무소속 의원의 복당 필요성을 역설하며 DJ를 인용했다.
이 후보는 “시민운동가라면 원칙을 끝까지 지키는 게 중요하지만, (정치인은) 바뀐 상황에 따라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야 한다”며 “한번 결정했다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건 옳지 않은 태도다. 민 의원 복당 문제도 사실은 같다”고 말했다. 민 의원의 탈당에 대해선 “민주당 또는 개혁 진영의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나름 희생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1년 내 복당 금지) 규정도 중요하지만, 국민과 지지층 의견도 충분히 고려해 상황에 맞춰 판단하는 게 옳다”는 게 그가 DJ를 인용해 내린 결론이었다.
DJ는 이어 “국민의 손을 잡고 반걸음만 앞서가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이 말은 DJ가 당시 열린우리당 지도부에 건넨 충고이기도 했다. DJ는 “참여정부가 일련의 민주적 조치들을 펼치고 있음을 평가하지만, 국민 의사를 수렴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며 “현대 정치는 국민을 무시하고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자서전에 적었다. 그러면서 “목적이 정의롭고 고상할수록 ‘국민과 함께’라는 방법상의 원칙은 더욱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서생적 문제의식’을 추진하는 데 있어 국민 공감대를 고려하라는 게 DJ가 ‘상인적 현실 감각’을 언급한 이유였다.
이 후보는 지난 3일 기자간담회에서도 DJ의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 감각’이란 말을 “매우 좋아한다”며 소개했다. 하지만 최근 행보는 DJ가 강조한 민심과는 반대로 가고 있다. ‘이재명 방탄’ 논란이 일었던 당헌 80조 개정이 대표적이다. 이 후보는 “학교 빨리 가기 위해서 샛문을 만들었는데 그게 어느 날 도둑의 침탈 루트가 되면 막아야 한다”고 개정 필요성을 강조했는데, 정작 KBS·한국리서치 여론조사(12~14일)에선 개정 반대(48.8%)가 찬성(36.1%) 여론을 압도했다. 이 후보가 ‘개혁 진영의 소망’이라며 옹호한 검수완박 역시 여론조사(한국갤럽, 5월 3~4일)에선 ‘잘못된 일’이란 응답이 47%로 더 높았다.
다음날 이해찬 당시 민주당 대표가 비공개회의에서 이 발언을 질타했고, 강경파 정청래 의원도 “매 맞을 일”이라고 일갈했다. 하지만 당리당략을 넘어선 그의 원칙론은 ‘내로남불 민주당’에 질렸던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다음 달 실시된 한국갤럽 조사(2020년 8월 11~13일)에서 이 후보는 지지율이 13%→19%로 오르며, ‘무공천 당헌 개정’에 찬성했던 이낙연 전 국무총리를 앞질렀다. 결국 패배하긴 했지만 역대 민주당 대선 후보 최다 득표인 1614만 7738표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했다. 최근 “특검도 탄핵도 당원 투표로 하자”고 외치는 이 후보가 되돌아봤으면 하는 순간이다.
(※기사에 인용된 여론조사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