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필리핀 마닐라 파견 경찰인 김병학 경정은 정보원으로부터 연락 한 통을 받았다. 10년 전 검거하지 못했던 보이스피싱 공범 A씨(33)의 소재를 알고 있다는 거였다.
김 경정은 A씨의 거처 인근에 필리핀 경찰과 함께 3개월가량 잠복했다. 피의자가 도중에 한 차례 거처를 옮기는 바람에 다시 쫓아야 했다. 때를 기다리던 김 경정과 현지 경찰은 지난 7월 보이스피싱 연락책 A씨를 검거해 국내로 송환했다.
코리안데스크는 불법 총기가 판치는 필리핀에서도 총기를 소지할 수 없고 방탄복이 유일한 보호 도구다. 피의자가 공격한다면 정당방위 정도의 대응만 가능하다.
총책 바로 아래급인 A씨는 2011년 11월부터 필리핀에 있는 보이스피싱 사무실에서 상담원으로 일하며 피해자 약 475명을 속여 3억 3000만원을 대포계좌로 챙겼다. 이듬해 10월까지 같이 활동하던 조직원 8명은 붙잡혀 사기 등 혐의로 구속 송치됐지만 A씨는 도주했다. 서울서부지검은 보완수사를 거쳐 지난달 21일 A씨를 구속 기소했다.
7000여개 섬으로 이뤄진 영어권 국가…경찰력도 약해
필리핀은 최근까지도 범죄자들이 선호하는 도피처였다. 김용판 국민의힘 의원실이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7년~2021년 5년간 총 781명의 범죄자가 필리핀으로 도망쳤고, 434명이 검거돼 송환됐다. 국외도피사범 수로는 최근 5년간 1258명이 도피해 총 404명이 송환된 중국에 이어 두번째다.
7107개의 섬으로 이뤄진 지형도 범죄자들이 필리핀을 선호하는 이유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섬에 숨어들면 오랜 기간 동안 찾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특히 영어권인 데다 달러가 통용되는 점도 범죄자들에건 ‘매력’이다. 주필리핀 한국대사관에서 경찰주재관을 지낸 박외병 동서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영어를 조금만 할 줄 알면 생활에 지장이 없는 데다, 한국인이 이미 많이 진출해 있어 눈에 띌 염려가 적다”며 “출입국 절차나 공항 검색도 미국 등에 비해 까다롭지 않다”고 말했다. 낮은 물가 수준도 오랜 도피 생활에 유리한 점이다.
코리안데스크는 A씨에 앞서 지난해 ‘김미영 팀장’으로 통하던 보이스피싱 총책을 검거했고, 지난달에는 국내 최대 성매매 알선 사이트 ‘밤의 전쟁’ 운영자를 송환했다.
현지 경찰과 2~3개월 잠복, 평소에 ‘레이더’ 깔아 놔
‘정보 수집’이 주 업무인 파견 경찰의 활동은 크게 현지 경찰과 체포를 준비하는 과정과 정보원을 접촉하는 과정, 두 가지로 나뉜다. 김 경정도 하루 근무 시간의 절반 이상을 현지 경찰, 교민 등과 접촉하며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쓴다. 하루에 보통 2~3개의 약속을 잡고 많은 시간을 마닐라의 교통체증 속에 갇혀 보낸다. 지난 2020년부터 파견된 김 경정은이렇게 ‘레이더’를 깔다 코로나19에도 3번이나 걸렸다고 한다.
필리핀 등지에서 코리안데스크의 활약에도 해외도피사범은 증가세다. 2018년 579명에서 2021년 953명으로 늘었다. 박 교수는 “코리안데스크는 한국 경찰들이 현지 경찰기관 내에 같이 근무하면서 실시간 공조할 수 있는 유용한 제도”라며 “교민 보호에도 일익을 담당하는만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